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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랙빈 Sep 26. 2023

블랙빈에게 쓰다

17 때로는 무언가가 부서질 때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삶은 결코 아무도 모르게 흐르지 않는다. 삶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쓸려간다. 삶은 늘 단순하거나 순조롭지 않다.’(p101)는 낸시의 말처럼 삶은 파도처럼 엄청난 기세로 몰려와 거품을 일으키며 부서지고, 평화롭고 달콤한 곳에 있다가 갑자기 멱살 잡혀서 준비되지 않은 현실로  내동댕이쳐지기도 한다.


여자는 자신의 삶에서 낸시가 말한 그 시간이 언제였나 되짚어 본다. 2016년 건강검진 결과로 남편의 폐에서 발견된 종양이 결국 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녀의 남편은 2011년 8월 왼쪽 폐에 결절이 생겨 서울 삼성의료원에서 수술을 했다. 그 당시 쉰을 목전에 둔 남편은 방사청의 사무실에서 하루 두 갑의 줄담배를 피워댔다. 양복에 묻어 있는 아니 배어있다 못해 절여져 있는 담배냄새가 가장의 무게라 여겼던 여자는 남편에게 담배를 줄이라는 말밖엔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가지 않고 옆으로 가는 배를 해결하느라 일에 묶이고 매여 있던 남편은 수술날짜도 여름휴가에 맞춰 잡았다.


다행히 암은 아니었다. 2박 3일의 입원과 하루 동안의 휴식 후 다시 정상 출근을 했다. 수술 후 다행히 담배를 끊었고, 옆으로 가는 배는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대신 건강을 택했다. 그렇게 몸을 챙기며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5년 만에 오른쪽 폐 중간에 종양이 생겼다. 점처럼 보였던 그 환한 불빛이 초기 암일 확률이 높다고 수술 전 검사를 해야 하니 서울 병원으로 와 달라는 남편의 전화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남편을 만나러 서울 강남 성모병원으로 가는 SRT 기차에서 소리 없이 울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검사결과를 남편 혼자 들었을 그 적막의 시간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혼자 간다고 우겼어도 같이 갔어야 했다는 후회가 눈물이 되었고,  첫 수술 후 회복에 남다름을 보였던 남편의 건강을 맹신하며 안일하게 생각했던 시간이 회한의 울음이 되어 흘렀다.


병원 로비에 앉아 있는 남편은 의외로 덤덤했다. 입원해서 검사를 하고 수술날짜를 잡고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부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요동치는 마음과는 달리 일상의 시간이 평범하게 흘렀다. 새 해가 밝았고 정유년 첫 미사를 드리며 주님께 남편의 무안을 기도했다. 여자의 남편은 2017년 자신의 쉰여섯 생일에 폐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방사능 치료는 없었다. 천운이라고 했다. 일반환자에서 5년간 추적검사를 해야 하는 암환자로 분류되었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놓였다. 파도처럼 밀려왔던 일이 다시 파도에 쓸려 나갔다. 다사다난했던 5년이 지나고 2022년 완치판정을 받기까지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삶은 늘 단순하거나 순조롭지 않지만 그럭저럭 잘 흘러간다는 것을 체험했다.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무심한 시간에 있음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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