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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다림 Sep 20. 2023

처음을 떠올린다는 건

지난 주말, 남편 사촌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남편 사촌동생이니... 결혼생활 11년 만에 딱 한 번 만나봤다. 대화해 본 적도 없다. 그래서 결혼식은 남편만 가도 충분했다.


결혼식은 서울이었다. 지방 사는 친척들을 위해 대절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일정.

남편은 막상 금요일이 되자, 혼자 가기 싫다며, 심심하다며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들 핑계로 안 된다고 했는데, 갑자기 아들이 같이 가보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아빠가 저녁으로 사준 아들의 최애 돼지국밥에 넘어간 것 같았다.


토요일 새벽 5시에 일어나 7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친척 어른들께 인사하고 출발.

서울 가는 동안 비는 왜 이렇게 오는지.

피곤한데 잠은 왜 안 오는지.

휴게소 내릴 땐 왜 비가 억수같이 오는지!

짜증이 밀려왔지만, 대절 버스에서 남편에게 성질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결혼식장.

예식이 시작되고부터는 나 혼자 감동의 연속이었다.

주례 대신 진행되는 신랑신부 아버지들의 말씀들은 왜 이리 가슴을 울리는지.

신랑이 신부에게 부르는 축가는 왜 이리 긴장되는지.

축가 부르는 신랑을 쳐다보며 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사랑스러운 응원을 보내는 신부의 모습은 또 왜 이리 아리따운지.


나도 11년 전에는 남편에게 저렇게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냈겠지? 우리 서로 따스했겠지?


나도 '처음', '시작'인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의 사랑, 설렘은 잊고

서울 가는 버스 내내 속으로 남편을 미워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이 일에 대한 나의 속 좁은 화는 분출될 수 없었다.


'초심'

처음을 기억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꼭 필요한 일이었다.


우리 부부의 처음을 떠올리며

나도 말랑말랑, 설렘설렘한 멜로 눈빛을 장착해보려 한다.


후. 근데. 며칠이나 갈지 모르겠네. 우린 찐 부부니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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