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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부했습니다

by 백작

2015학년도 연구부장 업무를 거부했습니다. 2014년 1년간 학교교육과정을 책임지는 연구부장이었습니다. 학교 3년 근무한 제가 다른 학교 이동을 희망했습니다. 연구부장 맡은지 1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학교에 남아 새해 연구 업무를 할 거라고 예상했던 관리자는 당황했습니다. 인사이동결과 이동에 실패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첫째와 둘째가 옆 학교에 있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늦은 밤까지 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4시 30분부터 퇴근 준비하는 선생님을 볼 때마다 나는 왜 학교에 남아 있는지 쌓인 서류더미에 한숨이 났습니다. 나도 같이 퇴근해 봤자 일은 밀릴 테니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신학기 교육과정 설명회 날짜가 잡혔을 때 일입니다. 학교 전반 연간 행사를 설명해야 하고요, 학급 교육과정 설명회도 겸해야 합니다. 자료 준비와 리허설, 방송 장비까지 안내하고 협조 요청을 했지요. 설명회를 마친 후 교육과정 완성본을 교육청에 제출해야 했고, 학년 교육과정도 제가 작업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자기 계발도 하지 않았고 아이들 챙길 겨를도 없이 학교 업무만 하는데도 새벽 1시부터 새벽 4시에 학년 교육과정 파일을 완성하여 학교에 가져간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초등 2학년 부장과 겸하고 있고 2학년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데도 옆 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큰딸의 수학 문제 하나 제대로 가르친 적 없을 정도로 딸아이의 학교생활엔 방임했었습니다. 여유가 없었던 거지요.

2학년 부장 겸 연구부장. 대단해 보이지요? 2학년 부장 같은 학년에는 원로교사 세 명과 함께 했습니다. 저는 가장 어린 교사이자 부장이었고요. 학년 일도 제 것입니다. 하루는 저의 교실 뒤 작품을 거는 공간에 예쁘게 장식을 해주겠다며 엄마와 같은 나이인 대 선배 교사가 시간외 근무를 신청했습니다. 저는 뒤판을 꾸밀 겨를도 없었고 꾸미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도 보고 공문, 내일도 보고 공문이었고요, 2학년 수업 준비도 벅찼거든요. 그런데 원로 교사가 남아서 제 교실 꾸미기를 돕는다는 건, 그만큼 어른을 챙겨야 하는 일이 더해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선 저녁식사를 주문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드시기 편한 음식을 정해서 주문과 배달을 받아야겠지요. 그리고 저의 뒤 게시판에 붙일 제목이나 이름표 같은 한글 파일을 선생님이 보시기에 적당한 크기로 만들어서 한글 작업을 해드려야 했습니다. 코팅기를 사용하신다면 열을 가하도록 세팅해 드려야 했고요, 중간중간 컴 작업이 쉽지 않으면 저를 수시로 연구실에 불렀습니다. 저는 왜 남은 걸까요. 차라리 집에 가서 연구부 일을 해오는 게 나을뻔했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1시간 먼저 퇴근하시는 선배님을 본관에서 별관 신발장까지 모셔다드렸다가 다시 본관 경비 아저씨가 열어주는 중앙현관까지 계단 헛디디지 않도록 챙겨 드렸답니다. 도와준다는 손길을 말리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모습이 2학년 부장의 역할이었죠.

2014년 제업무는

연구부장 교육과정업무에

학년부장업무

학년연구업무

학년통계수집

국제이해교육과제중점학교 주무

문화예술강사관리

주5일 수업제

교육기부사업

창제도서선정

검정도서선정

학교 일에 파묻혀서 둘째를 어린이집 야간 보육까지 맡기고 싶지 않아 병설 유치원에 입학시키기로 했기에 연구부장 업무는 더더욱 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처음엔 교과전담을 주겠다고 했다가 연구부장 업무를 수락하니 2학년 부장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원로교사 3명을 함께 학년에 넣은 거지요. 이러한 과정에서 관리자에 대한 신뢰는 깨졌습니다.

2015년 연구부장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 설득작업이 들어왔습니다. 한 과목만 가르치는 교과 전담을 주고 업무를 줄일 테니까 맡아란 말이었습니다. 또다시 거부했습니다. 다시 말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조건 좋아진다면 누구든지 하면 되겠다고 말씀드렸고요. 그래서 저는 원하는 4학년에서도 밀리고 독서교육부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있었던 일을 나열하는 것은 그 당시 학교가 저한테 심하게 했다는 걸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1년간 과정에서 닥치는 대로, 하루살이처럼, 일을 쳐내는 삶을 살다 보니 도움 된 점이 분명 있습니다.

그 사실을 10년 후 지금 제 모습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저는 라이팅 코치로서 글 친구들을 돕고 있습니다. 중간에 일이 끼어듭니다. 한 명의 글 친구의 원고를 읽고 있으면 다른 글 친구가 목차 요청을 해봅니다. 그리고 공저 작업을 하는 공저 작가가 본인의 원고를 읽어봐 달라고 할 때도 있으며 초고 진행이 잘 안된다며 저에게 상담전화도 합니다. 저도 책 읽어야 하고 글도 써야 하며 글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는 강의 피피티도 보완하고 리허설도 합니다. 블로그 포스팅도 하고 무료특강 신청자에게 안내 문자도 보냅니다. 다음 달 계획도 세우는 등 일정이 분주하게 돌아갑니다. 무엇보다도 저도 먼저 제가 따르는 스승에게 강의도 들어야 하고요, 주말에 있는 작가 행사도 다녀오곤 합니다. 이렇게 바쁜 코치 업무는 퇴근 후 이루어지는 거지요. 하루를 48시간으로 사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순발력과 멀티태스킹은 10년 전 연구부장 업무를 통해 익숙해진 것입니다.

혹자는 멀티태스킹이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와 자주 소통하지 않는 모 작가는 제가 여유가 하나도 없어 보인다고도 했고요. 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입니다. 저는 몰려오는 일을 동시다발적으로 해결하는 일에 스릴을 느낍니다. 제가 어디까지 버티고 해결할 수 있는지 게임하듯 즐깁니다. 저에겐 지치고 힘들고 짜증 나는 감정 따위는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감정도 시간이 있어야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연구부장 삶이 고난이었고 견디기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학교 교육과정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학교에서 잡다한 일은 혼자 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공문 보고 일은 절대로 놓치지 마라. 그건 연구부장의 능력을 보여주는 거다. 연구부 장일 힘들다 소리 1년간 어디에도 하지 마라."라고 전임 부장이 제게 말하고 일을 전달했을 땐 알지 못했던 일의 무게를 1년간 이겨냈었습니다.

지금 코치로서의 삶에서 짧은 투자 시간에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순발력을 만든 계기는 연구부장 업무였습니다. 이렇게 저는 글 쓰는 삶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재해석할 수 있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지금 제 삶에도 날마다 좋은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딸 셋 키우는 일도, 부모님 병원 신세도 염려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을 행복하다고 여기는 건 제가 할 일이 있고 일에서 성과를 내는 재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를 이해 못 하는 이들에게 마음 주고 신경 쓸 겨를 없습니다. 저는 오직 저를 의지하며 글 쓰는 친구들에게 저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의지를 주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과거의 저와 현재의 제가 만나 화해하는 과정입니다. 퇴근 후 연구부장 일을 했던 저도, 자정을 지나 키보드를 두드리는 저도 모두 쓰는 삶을 만난 덕분에 소중한 순간으로 기억됩니다.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렇게 제가 누리는 글 쓰는 삶의 기쁨을 저와 함께 쌓아가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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