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하게 혼자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을 내 편이라고 생각하고 정을 준다면 이후에 상처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입학하자마자 동네에서 친한 친구 림이와 같은 초등학교 출신 두 명과 저. 총 네 명이 1학년 2반이 되었습니다. 반에는 저 포함 50명의 학생이 있었으니 제가 아는 친구는 세 명뿐이었습니다. 입학 성적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200명 중에 6등을 했고 우리 반에서는 2등이었습니다. 입학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우리 반에서 3등 한 선이와 저는 짝이었습니다. 키 번호로 선이는 5번, 저는 6번이었습니다. 맨 앞줄에 앉았습니다.
어느 날부터인지 선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어색했습니다. 나만 아니었다면 본인이 2등을 했을 거라는 말도 했었고 자기 아버지가 임업 협동조합에 다닌다는 말도 했습니다. 저는 임협에 다닌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런저런 말로 저를 자극하는 듯한데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무덤덤하게 지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동네에서 함께 버스 타고 통학했던 림도 저를 대하는 게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눈길도 피하고 화장실 갈 때도, 도시락을 먹을 때도 저를 상대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50명 중에서 48명이 선이 편에 선 것 같았습니다. 단 한 명만 저와 밥을 먹었습니다. 선이한테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같은 동네에서 6년이나 함께 초등학교에 다녔던 림이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인생을 길게 봤을 때 중 1 시절 왕따 경험은 저에게 인간관계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걸 배우게 해주었습니다. 그때 학교생활에 고민을 엄마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엄마는 중학교 입학할 무렵 합격한 상태에서 외할아버지가 위독하셔서 제날짜에 입학하지 못하셨습니다. 공부에 대한 열망은 있으셨고 나이가 든 후 다시 중학교 과정부터 공부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제 나이에 배우지 못한 점을 어른이 되어서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친구 관계 때문에 고민하던 나에게 한마디 하셨습니다.
"친구 신경 쓰지 말고 공부 1등 해. 그러면 다 해결돼."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함께 조언을 들으니 엄마 몫까지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후 저는 성적 관리하면서 중고등학교 시절 보냈습니다. 중 3 중간고사에서는 전교 3등을 했고 고3 어느 날 수능 모의고사에서는 1등을 했습니다. 공부에서 자신감을 얻으니 인간관계에 걱정이나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 주변에는 반별로 1등을 차지했던 친구이자 저와 야간 자율학습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 바라보며 대화하던 친구 두 명이 있었고 마흔 중반이 된 지금도 소통합니다.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모 선교사의 아파트에 기독교 동아리 선배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기숙사 지원에서 떨어졌고 동아리 선배와 연결이 되어 선교사 아파트에서 4년간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동기였던 정이와 1학년 때 수강신청을 같이 해서 시간표도 똑같았습니다. 점심도 같이 먹고 조별 활동도 함께 했습니다. 같은 공간에 살고 학교생활도 함께 했으니 저는 단짝 같았습니다. 기독교 동아리까지, 일요일 예배 공간도 함께 하다 보니 항상 좋은 면만 볼 수는 없었습니다. 선배들 입장에서도 신입생 두 명이 마음에 들 리 없었을 겁니다. 공동체 생활을 통해 배려하는 훈련을 받는다고 여기라는 조언도 도움 되었습니다. 동기끼리의 배려는 쉽지 않은가 봅니다. 저는 성적 겨우 맞춰 교대에 갔었고, 정이는 서울 갈 실력이었는데 수능 점수에 맞춰 입학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돈이 없었고 친구는 돈이 있었습니다. 7명이 함께 하는 아파트에는 매달 7만 원 방값, 7만 원 생활비를 냈습니다. 집에서 넉넉하게 지원을 해줄 수 있었더라면 공동체 생활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근근이 돈을 냈습니다. 어느 날부터 생활비를 내지 못했는데요, 과외도 다 끊어졌고 집에서도 전혀 지원을 해주지 못하던 기간이 있었습니다. 자주 연락하지 않았던 아홉 살 많은 사촌 오빠에게 10만 원 빌려 썼다가 돌려준 적도 있었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때 아파트에 세탁기가 고장 났습니다. 새것으로 사야 하는데 함께 사는 언니들과 친구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생활비 제때 못 냈는데 란현이는 세탁기 값을 더 내야 하는 것 아니냐?" IMF 지난 후 아빠의 운수업은 짐을 싣지 못했고 제 명의로 발급된 신용카드로 현금서비스를 타간 상태였습니다. 이래저래 치인 상황에서 친구는 제게 100만 원을 빌려주었습니다. 세탁기 값, 카드 값, 생활비 내고 나서 한숨 돌렸지요. 대학교 3년 말쯤으로 기억합니다. 1년 후에 임용고시 치고 발령받으면 갚기로 했습니다.
1년 후 발령받았습니다. 첫 달 월급이 140만 원이었고 월세가 30만 원이었습니다. 친구 돈부터 줘야 하는데 바로 주지 못했습니다. 내용증명 우편이 첫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대출도 되지 않는 신규였습니다. 2금융에서 친구가 요구한 원금 100만 원과 빌려준 기간에 해당하는 연 7퍼센트의 이자까지 대출받아 친구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10년이 지났을 때 정이가 제게 설문지를 보내왔습니다. 대학원 논문을 써야 하는데 학급 아이들에게 설문을 받아달라는 거였습니다. 설문 결과를 착불로 보내라고 했지만 설문해서 선불 처리로 하여 택배 발송했습니다. 그 이후 잘 받았다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이후로 저는 저의 인간관계에서 룸메이트였던 친구를 제외했습니다. 학생 신분으로 2002년에 제게 100만 원 빌려주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것 잘 압니다. 그래서 고맙게 생각했습니다. 거기까지입니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인간관계에서도 기대하면 상처받을 수 있다는 점을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회사에 다닐 때 회사 상사에 대한 불안을 나에게 전화해서 털어놓던 A는 회사 그만두자마자 제게 이번보다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사까지 하고 나니 인근에 사는 사람과 소통하기 시작했지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동안 왜 그렇게 회사 욕을 제가 들어주고 있었는지 후회가 됩니다. 한 번 통화하면 1시간은 금방 넘긴 시간들도 저에겐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회사 일을 털어놓을 곳에 저 분이겠거니 싶어서 집중해서 이야기를 들었던 날들이 연락 끊어진 마당에 억울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 같았습니다. 이사, 퇴사 후 A는 더 이상 저에겐 말할 거리가 없다 보다 생각했습니다.
과거의 인간관계 경험은 현재 살아가는데 지혜가 됩니다. 특히 글 쓰는 작가라서 더 뚜렷하게 느끼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앞으로도 연결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혜롭게 말과 행동을 하는데 교과서처럼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인간관계에서 기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줄 수 있는 것은 줍니다. 줬다는 사실도 잊어버립니다. 어디에 기록하지도 않습니다. 삶을 철저하게 혼자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상대방에게 기대하지 않으니 작은 친절에 오히려 감동을 받게 됩니다. 고맙다는 카톡 인사만으로도 눈물 날 때 있을 정도입니다.
인간관계에 대해 기대했고 상처받았던 시간은 작가가 된 지금 철저하게 혼자가 되게 해주었습니다. 글쓰기는 혼자만의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작업입니다. 제가 이 사람, 저 사람 챙기느라 시간을 소모한다면 퇴근 후 작가와 라이팅 코치 일은 할 수 없겠지요.
어쩌면 상처라고 표현하며 나열한 경험을 다시 읽어보니 저의 주관적인 판단이 들어가 있습니다. 글을 쓰면서 과거를 떠올려 보면 내 중심으로 그들을 판단하고 살았다는 마음도 생깁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글쓰기 전보다 저의 내면을 조금이라도 더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노력까지도 선물해 줍니다. 그래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간을 자주 가지고자 노력합니다. 제 삶과 거리가 멀었던 '글쓰기'였는데 이젠 점점 사이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친했던 사람도 계기가 생길 때 연락이 뜸해지기도 한다는 점, 지금 연이 닿은 사람들에게 마음으로 최선을 하다고 그들이 책을 내도록 돕는 자로 살아가는 삶. 이것이 제가 과거를 통해 배운 결과입니다.
과거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했던 일들은 엄마, 아내, 딸, 교사, 작가, 제자, 라이팅 코치 등 제가 맡은 역할에 대해 부담을 덜 가지면서도 역할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