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척거림이 아닌 ‘선명한 나’를 입력하다.
“결국 깨달았다. 자신을 알리지 않고 세상이 알아주기만을 바라는 것은 담백함이 아니라 어쩌면 '오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제 질척거림이 아닌 '선명함'으로, 조직이라는 시스템에 자신의 역량을 능동적으로 입력하며 새로운 유연함을 배우고자 한다.”
나는 일을 잘했다. 간부급 직원이 되어, 한 직장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정 정도의 수정과 적응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가진 시스템 - 말하자면, 건물의 골격은 그대로이고 필요에 따라 외장과 인테리어만 수정한 건물과 같이 리노베이션 만을 거친- 하에서 30년 넘게 일하면서 모든 동료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과분한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들은 건 칭찬이 대부분이었고, 좌절도 거의 없었다. 조직에서 앞서 나가지 못하여 소위 잘 나간다는 사람이 되지는 못했으며 평생 운명을 좌우할 중차대한 일만 하고 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드러나지 않는 무미건조한 일만 하고 살지도 않았다. 시민들의 관심을 받고 그래서 언론에 보도될 만한 일을 해서, 내가 맡은 일이 언론에 나오면 자부심과 보람도 컸다. 언론 보도를 위한 기자들의 관심이 나에 대한 관심이라 생각해서 우쭐하기도 했다. 내가 관종이라는 깨달음도 얻었다.
나는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조직 내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모두 내게 찾아와 맞닥뜨린 문제를 상의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개인적 고민과 진로를 상담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가깝게 다가가기에는 편치 않을 수도 있는 윗사람이었지만 다들 내가 일하는 사무실을 찾아오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별다른 일이 있지 않아도 찾아와 말을 거는 후배 동료들도 많았다. 심심찮게 점심을 같이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맞았고 가벼운 저녁자리나 퇴근 후 술 한잔을 제안받기도 했다. 윗사람의 강압에 의한 것도 꼰대질을 감수하는 것도 아니라 여겼고 그래서 같이 하는 시간들이 좋았다.
고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고객들의 나에 대한 평가는 과분할 정도로 긍정적이고 호의적이었다. 일의 특성상 고객과의 사이에 어느 정도 긴장관계는 피할 수 없었고 때로는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감이 느껴지는 상황을 원만하게 넘길 줄 알았다. 터지기 직전 같은 풍선의 바람을 견딜만하게 빼줄 통로 역할을 곧잘 해냈다. 고객들이 일을 편히 할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었고 그들이 속한 조직에서 원만히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었다. 일과 시간에 못하거나 미진한 일이 있으면 점심, 저녁식사를 하면서 충분히 소통하고 친근한 느낌을 가지면서도 서로 이해를 높일 수 있게 했다. 그렇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고객들과의 관계도 ‘일로 만난 사이’였을 뿐이다. 그 이상 친해지려 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내 사적 이익을 위해 활용할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우리가 남이가? " 맞다. “우리는 남이다.” 그냥 친한 남남 사이. 나는 고객들이 나를 높게 평가하고 호의적이었던 데는 나의 이런 태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친절하지만 서로의 사적인 공간을 철저히 존중하는 태도, 그렇지만 일로 엮였을 때는 전심전력으로 노력하는 진정성과 성실성, 일이 끝난 자리에서는 깔끔하게 돌아서는 깨끗함. 판사로 일하다 드라마작가로 전업한 분의 말처럼, "철저하게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협업에만 충실히 임"했고 "친절하게 대하되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으려 " 했다(문유석, ‘나로 살 결심‘).
이처럼 나는, 나의 일을 했고 나의 일로 평가받았으며 나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조직 안에서 내 적성과 능력에 부합하는 자리를 맡아 일을 할 수 있었다. 질척거림과는 정반대로, 나는 담백하려 했다. 사전적 의미로 ‘담백하다'는 '아무런 사심이나 욕심이 없고 깨끗하다'는 말이란다. 내가 완전히 사심이나 욕심이 없는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담백함은 거짓이 없음을, 진정성이 있음을,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아 믿을만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담백한 사람’이다. 조직 안에서 이런 내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공감하는 경우가 있다. 드러내 놓고 얘기하지는 않지만 담백함을 알고 받아들여 주는 동료들과 고객들이 보인다. 본능적으로 비슷함을 안다. 그렇지만 질척거림을 싫어하는 것 역시 본능적으로 알기에 드러내 놓고 가까워지지는 않는다. 염화미소처럼 알아볼 뿐이다. 편견일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일반적으로 일을 잘한다. 나처럼 시스템을 신뢰하고 “그 시스템의 일부로서 내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문유석, ‘나로 살 결심’). 나는 그들이 좋다. 그들과 친밀감을 느낀다. 내가 가깝다고 여기는 동료들은 대부분 그런 담백한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그런 동료들이 잘되고 주변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랬던 내가 ‘질척거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일이 있었다. 주로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과 맡고 싶은 자리에 대한 소망과 관련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 같다. 조직 안에서 나에 대한 평가가 좋기는 한데 정작 평가가 앞으로의 업무와 연결되지는 않는 것 같다. '나에 대해 시스템이 잘 모르나?' '제대로 평가가 되지 않나?'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뭔가 더 해야 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나를 알려야 할 것 같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고 얼마나 잘할 수 있는지 적극적으로 팔아야 할 것 같다. 필요하면 감정에 호소해야 할 것 같다. 시쳇말로 ‘드러누워야’ 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질척거려야’ 할 것 같다. 질척거리기까지 해야 하나 싶기는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를 알리고 파는 것이며, 나 자신에 대해 PR을 하는 것이지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해 본다. 주변에 동료들도 나를 아끼는 분들도 자기를 알리고 열심히 호소하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격려하고 독려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하신다. 결국 ‘우는 아기 떡 하나 더 준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내가 ‘질척거림’에 대해 잘못 생각했나 하는 의문이 든다. 나의 담백함이 결벽이고 소극이었으며, 조직 안에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뒤늦은 후회가 생기기도 한다. 나는 인생을 잘 못 살았던 것인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설령, 시간이 더 지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내 삶을 뒤돌아 볼 시간이 왔을 때, 내가 지금의 내 모습을 결코 후회하게 될 것 같지 않다. 내가 다시 한번 더 살아볼 기회가 생긴다 해도 난 똑같이 담백하고 투명한 딱히 질척거리지 않는 삶을 살 것 같다. 다만,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알리고, 나와 비슷한 이들과 힘을 모으며,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해 좀 더 포용적인 사람이 되고자 할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잘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를 알리지 않으면서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고집스럽고 융통성 없는 답답한 생각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질척거릴 필요는 없지만 좀 선명해질 필요는 있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할 만큼 구차하게 굴 필요는 없겠지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능력이 있으며 무슨 일을 할지 알리지도 않으면서 세상이 알아주기만 기다리는 건 곤란하다. 그건 담백함이 아니라 오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자기 일 알아서 묵묵히 잘하는, 담백하고 어쩌면 좀 뻣뻣한 사람들이 더 많이 잘되기를 바란다면 같이 힘을 모으고 공감할 필요가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주변을 보면 아무래도 담백하고 뻣뻣한 사람들은 조직 안에서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한 것 같다. 천성이 담백하여 서로 잘 모르고 지내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소수이니 힘이 약하다. 개개인 능력이 있어 아주 밀리거나 손해를 보지는 않는데 그래도 마땅히 받을만한 대접과 기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그러지 않으려면 역시 드러내야 할 것 같다. 동굴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고 광장에 나서야 할 것 같다. 모이면 아무래도 덜 외롭지 않을까.
그리고 이제, 세상에는 나랑 비슷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와 다른 이들과도 같이 잘 살고 싶다. 어쩌면 나는 담백하고 싶다는 이유로 결벽증을 가진 사람처럼 행동했는지도 모른다. 타인이 보기에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다양성을 중시하며 세상에 어떠한 형태의 차별도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현실에서는 알게 모르게 내가 대다수의 사람들을 배척했던 건지도 모른다. 내가 외톨이면서 모르고 지냈을 수도 있다. 결국 다름을 받아들이고 일정 부분 성향이 맞지 않는 타인과도 어울려 살아야 하는 것이 사람 사는 방식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질척거림’이며 원하는 것은 ‘담백함‘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선명한 나 자신이 되어야겠다. 내가 원하는 바와 역량을 드러내고 알려야겠다. 조직이 잘 설계된 시스템에 따라 작동하려면 끊임없는 입력과 출력이 있어야 한다. 인사관리도 마찬가지이다. 조직이 필요한 인력 수요에 따라 가용한 자원이 무엇인지 알게 하려면 적극적으로 나를 입력시켜야 한다.
담백하게 그러나 선명하게, 나는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제안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역량이 더 있으며, 이를 통해 조직에 기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내가 조직 안에서 꼭 했어야 할 의무였을지도 모른다. 30년 넘게 조직생활을 하며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내 후배들은 나보다 좀 더 잘 알기를 바란다. 나도 아직 늦지 않았을 수도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다”라고 했던가? 좀 더 현명해져야겠다. 유연하고 열린 사고를 해야겠다. 질척거리고 싶지는 않지만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싶다. 그게 진정으로 담백한 내가 되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