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격 02] 미운 오리 새끼와 복사기 요정
야만의 시대에 처음 일을 시작한 나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심지어 책상에 놓인 사무실 전화기 수화기를 드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았다.
행정직 동료부터 선임 선배, 상사에 팀장까지 모두 다 자기 할 일을 알고 있고 능숙하게 일을 하고 있어 보이는데 나만 동떨어져 있었다. 당시 팀 내 총인원은 일곱 명, 일과 중 대부분의 시간에 누군가 한 사람은 업무 전화를 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팀장에게 결재를 받고 있었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문서를 만들기 위해 기안을 하고 행정직 동료에게 타이핑을 부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만… 할 일이 없었다.
간혹 내게 일을 가르쳐 주는 임무를 맡는 것으로 되어 있는 일 년 선배가 문서를 만들어 보라고 일감을 하나씩 주기는 하는데 처음 한두 번 시행착오를 겪은 뒤로는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 단순한 일이었다. 중요한 일들은 모두 선배들이 하고 있었고 ‘업무분장표’에 기재된 내 일은 가뭄에 콩 나듯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나머지 시간에는 그야말로 미운 오리 새끼처럼 앉아 있었다.
전산망도 없고 컴퓨터도 드문 시절이니 문서 파일이 전자화되어 있을 리는 만무했을 터, 문서를 철해서 파일로 만들어 보관하던 시절이다. 애꿎게 업무 파악한답시고 옛날 파일을 들춰 보고 있노라면 나른한 오후 식곤증에 조는 모습을 감추느라 눈치를 보며 오후를 때우고는 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만난 팀장은 내가 미덥지 않았던지 일을 맡기려 하지 않았다.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이 팀장이 최소 30%는 반면교사로서 역할을 했다고 믿는다.
이 분 때문에 직장을 관둬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으니 내 인생이 드라마라면 중요한 악역을 맡은 사람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지금 내가 당시 팀장보다도 더 나이가 많아지고 일도 할 만큼 한 뒤에 생각해 보면, 그분은 어떤 일을 누구에게 시켜야 하는지를 몰랐던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자신도 팀장의 역할이 익숙하지 않고 잘 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내가 할 일이 없는데, 일을 맡기지도 않아 할 일이 없는데, 내가 일머리가 모자라서인지는 몰라도 팀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슨 일인지 파악도 잘 못 하고 헤매고 있는데…
그런 내게 팀장은 내가 일을 너무 하지 않는다고 질책하는 것이었다.
밥값을 못 한다는 얘기를 이래저래 참으로 많이도 들었다.
억울하고 답답했다.
울고 싶었다.
뭐라도 시키면 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의욕도 넘치고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뭘 시작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눈치가 보여 바빠 보이는 선배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시켜 달라고 말을 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너무도 능숙하게 모든 일을 잘 해내고 있었다.
너무너무 부러웠다.
학교를 다니며 수업을 듣거나 수험서를 읽으며 입사 준비를 하는 것처럼 내가 열심히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회사 문을 나서면 친구나 가족들에게 대단한 직장에 취직해서 중요한 나랏일을 하는 것처럼 젠체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게 맞나 생각하며 몇 개월을 살았다.
그나마 내게 일할 기회를 준 것은 행정직 동료였다.
사무실에 앉아 있다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소위 ‘민원 전화’가 많았다.
담당자를 찾는 전화들 사이에서 행정직 분들은 타이핑해 주기에도 바쁜 마당에 전화를 붙들고 있다가는 팀장이나 선배들의 핀잔을 받을 수도 있었다.
제일 편하게 전화를 받아 달라 부탁할 수 있었던 게 나였나 보다.
영문도 모르고 내 책상으로 전환된 벨소리에 수화기를 들고 대답을 해 주거나 꾸짖음을 들었다.
왜 내가 혼을 나야 하는지 영문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사실에 애꿎게 혼나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내가 받는 월급 일부에 불평 들어주는 대가도 포함되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자주 받다 보니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도 같았다.
그다음부터는 회의 자료 복사할 일이 생기면 나서서 복사를 했고, 선배가 필요로 하는 게 보이면 눈치껏 미리 찾아다 바쳤다.
책상에 고개 처박고 앉아 있지만 않고 고개 들어 주변을 보니 내가 메워 줄 빈자리가 보였고 별것 아닌 일을 해도 보람이 생겼다.
그즈음 내 직장생활의 목표를 세웠던 것 같다.
나는 능력이 뛰어나지도 일을 잘하지도 못하는 것 같지만 대신 ’ 팀 내에서 누구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자.‘
아쉽고 불편한 일이 있을 때 주저하지 않고 나서서 다른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 되자.
자기 하기는 귀찮고 나에게 부탁하기도 미안해 보이는 일이 있으면 미리 눈치채고 나서서 하자.
있을 때 부각되기보다는 없어졌을 때 빈자리가 보이는 사람이 되자.
어차피 일 잘하는 능력자가 될 것 같지도 않았기에 내가 잘하는 것이 없다 생각하니 절로 겸손해졌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팀이 원활히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미리 챙겨 놓는 사람.
하다못해 복사기에 용지가 떨어지면 채워 두는 일도 내가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성실함이 평가받기 시작했다.
아니 그보다는 내가 스스로 일을 찾아 하니 타인의 평가를 기대하지도 않게 되었다.
잡일을 하다 보니 중요한 일도 하기 시작했고 믿음도 커졌다.
일이 점점 쌓이고 소위 ’ 바빠지기도’ 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건가.
이제는 살만하다 싶었지만 아쉬움이 있었다.
일을 잘하는 직장인이 되고 싶었는데 딱히 내가 일을 잘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 거다.
그냥 뭐든 시키는 일 군말 없이 하고 때로는 눈치 바르게 나서서 일을 하기도 하는데 그게 잘하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게 다가 아니라 이제는 회의가 들기도 했다.
뭐든 내가 다 받아서 군말 없이 하니 내 일이 아닌 것도 내 앞에 떨어지는 건 아닌지 마음속에 의심의 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몇 십 년 전 일을 이렇게 글로 쓰며 나 자신을 돌아보자니 우습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다.
어린 내가 귀엽기도 가소롭기도 하게 느껴진다.
그때는 그래도 심각했다.
내가 우스워 보일 것 같았고 업무로 내게 연락을 하는 다른 팀 직원들도 도무지 나를 가소롭게만 여기는 것 같았다.
‘이러다 내가 호구가 되는 것이 아닌가 ‘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만한가 싶었다.
한번 빠져든 생각은 걷잡을 수 없었다.
’왜 나는 팀 내 사무실 사람들이 부탁하면 군소리 없이 모든 일을 다 하는 거지? 그건 그렇다 쳐. 왜 다른 사무실에서 성가시고 귀찮은 일만 있으면 나부터 찾게 되는 걸까? 나는 그냥 주도적으로 내 일을 할 수 없는 건가? 날 바보로 아나’
어찌 보면 배가 불렀던 소리다.
일이 없어 좌절하고, 일도 없는데 일 안 한다고 혼나면서 서러워하던 때도 있었는데 금방 생각이 바뀌다니 참 할 말이 없다.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기는 했지만 동시에 대접을 받고 싶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서 일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하고 싶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하는데 두서없이 늘어놓고 이것저것 손대다 뭐 하나 끝내지 못하고 어설프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일하는 게 싫었다.
우선순위를 알고 일을 하면서 내 일에 평가도 받고, 그러면서도 모두에게 필요하지만 싹수없지도 않은 그런 일꾼이 되고자 했다.
그때였다. 조직 내에서 일 잘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 한 선배의 비밀을 듣게 된 것은.
#밥값의_무게 #민원전화와_복사기 #호구와_일꾼_사이
일만 하는 '호구'가 되지 않고 주도권을 쥐는 법, 그 깨달음의 순간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