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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미 Sep 07. 2024

양귀자 - 모순

진진이는 왜 그럴까


언니들과 독서모임 첫번째 책은

양귀자 모순











이 의자 비싸려나…?

내 몸 맞춤 제작한 의자인줄

세시간 동안 책보는데(한 시간은 잠)

허리 하나도 안아프고 목도 편하고 갖고싶다..










책읽기 시작!








 기록하고 싶은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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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내 삶에 대해 졸렬했다는 것, 나는 이제 인정한다. 지금부터라도 나는 내 생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되어 가는 대로 놓아두지 않고 적절한 순간, 내 삶의 방향키를 과감하게 돌릴 것이다. 인생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고라도 탐구하면서 살아야 하는 무엇이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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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이모가 멋진 크리스털 화병을 선생님에게 드렸다. 그때 이모가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보라색 라일락을 한 무더기 꽂으면 예쁠 것 같아서 사봤어요. 받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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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를 나로 놓고 보면, 그러면, 중요도가 확 달라진다. 조용히 입 다물고 구경만 할 수는 없다. 내 인생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나의 남동생의 인생도 가끔씩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다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김장우 같은 남자 어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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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몇 밤을 지내고 서울로 돌아오면 며칠 동안 적응이 안돼. 돌아가고 싶어지지. 산새 소리, 풀잎 눕는 소리, 계속물에 바람 스치는 소리, 두고 온 그런 것들 생각 때문에 오래 마음이 심란해지지. 도시는 나를 불안하게 해. 어디에 있어도 내 자리가 아니어서 불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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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피해자를 만나 합의를 하고 진모에게 뒤집어씌워진 어마어마한 죄목들을 물렁물렁한 죄목으로 바구는 일부터 착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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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주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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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어.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우리들 머릿속을 오고 가는 생각, 그것을 제외하고 나면 무엇으로 살았다는 증거를 삼을 수 있을까. 우리들 삶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는 것이 아버지가 가르쳐준 중요한 진리였어. 아버지가 잘못한 게 잇다면 너무 많이 생각했다는 것이지. 자기 용량을 초과해버린 거야. 그러면 곤란하다는 것도 우리 아버지가 내게 남긴 교훈이고. 아버지는 다른 아버지들이 한평생 살고도 못 가르쳐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어. 그것으로 이미 우리 아버지는 자식한테 해줘야 할 의무를 다했다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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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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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야 도 있지. 안진진이 있잖아. 옆에서 말도 해주고 같이 웃어주고 쉴 새 없이 숨소리를 내는 안진진이 있어서 순간순간이 충만할 텐데 뭣 대문에 카메라를 가져오겠니. 나는 이번 여행에서 사랑하는 꽃 이름을 부르는 대신 안진진의 이름만 열심히 부르기로 결심했어."


대답 대신 나는 김장우의 손을 잡는다. 그렇게 말할 줄 아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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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에서 사는 일에 대해 어머니는 이제 완전히 철인의 무사가 된 느김이었다. 어머니는 첫눈 따위 오거나 말거나 아무래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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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율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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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출을 못 견뎌하고 파격을 혐오한다고 해서 비난받아야 한다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어쩌면 나는 이모이 넘쳐나는 낭만에의 동경을 은근히 비난하는 쪽을 더 쉽게 선택하는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르겠다. 이모부 같은 사람을 비난 하는 것보다는 이모의 낭만성을 나무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쉽다. 그러나 내 어머니보다 이모를 더 사랑하는 이유도 바로 그 낭만성에 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랑을 시작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없는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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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말 전화가 끊어졌다. 간단없이 들려오는 통화중 신호음이 다음 말을 잇기 위해 아직도 멍하니 입 벌리고 있는 나를 비웃었다. 자기에게 나쁜 소식은 이런 식으로 막아내면 되는구나. 어이없게도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정녕 모르고 있었던 삶의 기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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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울었다. 추억 속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현실 속의 내 아버지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내 추억을 희롱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여태 기다렸는데, 이건 부당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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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고래 소리는 질렀지만, 나에게 아버지에 대해 여전히 포악한 어휘만 골라 사용하는 과장법을 잊지 않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진모 때처럼 또 슬슬 힘을 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 확실한 증거가 바로 어머니의 독서였다. 『정신분열즈의 이해와 치료』라는 의학서적에서 일본어 회화책으로, 그리고 느닷없이 딱딱한 법률서적을 읽어야 했던 어머니는 요즘 다시 『중풍, 이렇게 치료한다』나 『가정을 파괴하는 병, 치매』 같은 의학서적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포기하지도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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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보고 싶어 하는 이모'라거나 '네가 좋아하는 이모'라는 정도는 향기를 담을 줄 아는 사람이 이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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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종류의 불행과 행복을 택할 것인지 그것을 결정하는 문제뿐이었다.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ㅇ라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 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읽고나면 팬이 될 수 밖에 없는


작가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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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어 '진실'은 좀 식혀서 마셔야 하는 뜨거운 국물과 같다. 그러므로 숱하게 섰다 지웠다 하는 글쓰기에나 담아야 어울리는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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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까지 마친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고 어수선한 책상을 정리하다 문득 메모 노트를 발견했다. 한 편의 소설이 완성되는 긴 시간 동안 언제나 내 오른편에 놓여 흘러넘치는 말들을 받아주던 그 노트.


열심히 기계의 글자판을 두들기며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면 손가락이 치고 있는 내용과는 관계없는, 그러나 소설의 뒤나 앞에서 반드시 쓰이거나 쓰였어야 할 문장들이 저 혼자 뚜벅뚜벅 머릿속을 걸어다니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럴 때, 결단코 그 문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문장은 작가인 내가 만ㄷ르어내는 것이 아니다. 나 말고 누군가가, 오직 소설을 위해 아껴둔 한 말씀을 섬광처럼 발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메모 노트의 글시들은 몹시 난삽하다. 놓치기 전에 그 말들을 채집하려면 단정할 수가 없다. 그랬다가 혹시 놓치기라도 하면, 잃어버린 그 말들을 되찾기까지 도저히 일을 계속 할 수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찾다찾다 못해서 그만 울어버린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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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은 그 값만큼 알뜰살뜰하게 취급된다. 한 권의 책을 알뜰살뜰하게 읽는 법에 대해 궁리를 하다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메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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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


『모순』의 창작노트 곳곳에는 이런 종류의 복합어들이 아주 많이 발견된다. 흘려 쓴 글씨로 붙박여 있는 그 편린들은 아마도 주제에 관한 내 마음의 무늬일 터였다.


얼마 전부터 나는 이런 식의 서로 상반되는 단어들의 조합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하나의 개념어에 필연적으로 잇따르는 반대어, 거기엔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곡절을 보편성으로 풀어 쓰는 직업이 작가가 아니겠냐고 홀로 질문을 던지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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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설이 중반에 이르렀을 때,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우리들 모두, 인간이란 이름의 일란성 쌍생아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자각. 생김새와 성격은 다르지만, 한 번만 뒤집으면, 얼마든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수 있는 우리.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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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 살아가다 보면 이런 질문은 종종 받게 마련이다. 벌써 이십 년 작가였으므로 나 또한 수도 없이 이런 질문 앞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이십 년 세월 동안 그 대답도 자주 바뀌었다. 작가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하기 위해서는 작가인 나는, 살아낸 만큼, 소설을 쓴 만큼 대답할 수밖에 없어서였다. 


...


일상의 남루를 벗겨주고 상실감을 달래주는 작가의 자리에 대해, 요즘 나는 다시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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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소설이 쓰여지고 그것이 책으로 묶였다고 해서 소설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읽는다는 행위가 없으면, 읽기를 통해 독자와 소설이 생생히 교감하는 순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소설은 여전히 미완성인 것이다. 긴 시간 소설을 쓰면서 작가가 열렬히 소망하는 오직 하나는 독자를 통해 비로소 소설이 완성되는 그 순간의 교감이다. 그 소망 하나에 기대어 작가는 세상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침잠하여 소설을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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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독자들의 독후감은 소설에 대한 선입견을 조장한다. 그런 선입견은 자칫 작가에게는 소망을, 독자에게는 감동을, 소설 그 자체에는 완성의 기회를 앗아가는 적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순』을 쓰면서 이 소설을 읽는 모든 사람이 전부 '첫 독자'이길 꿈꾸었다. 소설에 관해 유포된 어떤 독후감에도 침범당하지 않은 순수한 첫 독자의 첫 독후감들을 많이 만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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