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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Apr 29. 2020

아가씨, 손이 왜 그래요?

마음이 아플 때 읽는 빨간약, 데미안


내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아주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유년시절, 부모님의 보호로 만들어진 태초의 세상은 나에게 따스한 것들을 많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안정이 가득한 그 세계에서 두려움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거침없는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성장은 기쁜 감정으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불던 기쁜 순간이 아닌, 눈물이 쏙 빠지는 힘든 순간을 경험하면서 어른이 되어왔다.

  생일 파티의 기쁨을 일상에서 배운 것처럼, 같은 반 사내아이(A)의 짓궂은 장난으로 인한 슬픔도 일상에서 배운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운동회 준비를 위해 단체로 율동을 연습하는 시간이 있었다. 짝이 된 A는 투박하고 재수 없는 장난을 쳤는데 그 장난을 그만두라는 표정과 요청은 늘 거절당했다. 나는 선생님이 시키는 연습시간을 평화롭게 마무리하기 위해 고인 눈물을 참았다.  나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나를 괴롭게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그때 내 마음은 참 무거웠다. '마음이 무겁다'라는 감정은 교과서에 배운 게 아니었다. 엄마가 차려주신 저녁을 맛있게 먹는 평온의 세계와 내일이면 다시 A를 만나야 한다는 두려움의 세계는 일상에서 공존했다.  <두 세계>는 그렇게나 가까운 경계에 닿은 채 나와 공존했다.


   A로 인한 악의 세계는 나의 울음으로 멈출 수 있었다. 다음 연습 시간에도 또 괴롭히길래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느낀 슬픔보다 더욱 과장하여 크게 울었다. 내가 계속 참기만 해서 선생님이 잘 모르시는 것 같으니 내일 또 괴롭히면 바로 울라며 말해준 엄마의 말을 따른 것이다. 뒷 일이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아이는 굉장히 당황했고, 주변의 친구들이 율동을 멈추고 나를 달래주며 당황하여 달려온 선생님께 이때까지의 일을 대신 말해주었던 것 같다. 울어서 해결된 일 중의 하나였다.


  소설 <데미안> 속,  싱클레어의 세계도 그렇게 시작된다. 그는 부모님과 누나들의 폭신한 온정 속에 선(善)의 미덕이 세상의 옳음이라고 믿으며 온순하고, 순종적이게 자랐다. 그런 그에게 프란츠 크로머는 그의 인생에 최초로 잠입한 악(惡)의 피사체였다. 크로머가 자신의 집을 배회하고 있었다는 서술은 '집'이라는 빛의 세계와 '크로머'라는 악의 세계가 멀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저마다 삶은 자아를 향해 가는 길이며, 그 길을 추구해 가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고등학교 때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 대가를 보상하기 위해 대학에서 교직 복수전공을 신청하고 161학점을 이수하며, 많게는 한 학기에 8개의 과목을 수강하며 다녔다. 세상 경험이 적고 공감능력이 부족한 매력 없는 사람이 되기 싫어서 학과 간부, 독서, 교환학생, 연구논문, 대외활동, 아르바이트, 각종 강연을 다니며 시간을 잘게 쪼개며 살았다. 꿈을 이루는 길은 힘들어도 행복했고, 곧 만나게 될 그 날이 너무 기다려졌다. 20대 중반의 나는 주말에 쉰 적이 거의 없었다.


  다른 친구들이 진로와 취업을 고민할 때, 나는 원하는 게 분명했으니 시간을 투자하며 실력을 키웠다. 끊임없이 내 삶의 방향성을 상기하면서 몸과 마음을 바쳐 공부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 끝을 알 수 없는 바닥과, 가늠할 수 없는 허망함이 나를 짓눌렀다. 그때의 나는 목표를 이룸에 있어 굉장한 아집이 있었고, 멈추기 전엔 몰랐던 조급함과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 있었다.


필압이 높아 중지에는 원래 굳은살이 있었으나 저 땐 더 심했고, 새끼손가락은 굳은살이 새로 생겨 부어있다.


 첫 시험을 치르고 왔던 날, 굳은 몸이 펴지지 않아 3시간을 누워있었고 식사를 할 수 없었으며 방에서 책을 정리하다가 4시간을 쉬지 않고 울었다. '내가 그걸 가지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라고 내뱉지도 못할 말을 속으로 삭히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을 원망했다. 불편한 상황을 울음으로 해결했던 초등학생 때와는 달리, 운다고 달라질 수 없는 큰 사건이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나의 3초짜리 선택은 두 가지의 다른 삶을 그려낼 시작점이 될 수 있었다. 외국 바이어들을 만나며 유럽으로 출장을 다니는 활발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은 90% 였고, 임용에 합격할 가능성은 2% 였다. 나는 모든 안락함과 호의를 거절한 채 2%를 위한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나를 편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독립하여, 내가 추구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에이비씨 디' 보다 '아베체데'가 익숙했던 독문과 여학생은 영어과 임용에서 -0.33이라는 숫자를 보게 되었다. 나에게 임용시험은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카드가 되어 끝이 났다.


  3년간의 고시생활은 울어도 해결 안 되는 일이 아닌, 운명을 찾아가는 <자유의지>가 내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한 시간이다. 내가 지나온 길은, 한 번도 되어 보지 않은 '나 자신' 이 되기 위해 내가 추구해온 길이었다. 태어나기가 두렵다 하여 알을 안 깨고 사는가?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다.  


   내 오른손이 왜 그러냐고 물어보는 분들은 늘 같은 표정을 하고 계신다. 어디 다친 것 아니냐는 걱정스러운 얼굴이다. 그 관심에 감사를 표현하지만 동시에 나는 내 손을 등 뒤로 빼며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도록 가렸다. 마치 하지 않아야 할 일을 했던 것처럼, 구구절절이 '필압이 높아서요, 서술형 시험을 준비해서요, 실력이 부족해서 조금 더 했어요' 라며 쫓기듯 설명했다. 힘든 여정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어린 마음이었고, 무식하게 덤빈 모습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나를 동정하지 마세요'와 같은 미숙한 자존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등 뒤로 손을 가린다고 한들 굳은살이 없어지지 않는다. 부정하고 싶어도, 지나온 그 시간을 지울 수는 없다. 알을 깨다 보니 다친 손은, 나 자신이 되려고 노력했던 흔적일 뿐이다.


  지나버린 과거의 내 모습이나 현재의 내 모습 중 어느 것 하나 내가 아닌 게 없고, 내가 이것만이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인간이 되지 못한 채 갇혀 죽을지언정 나 자신이 되어 가는 길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삶의 의미는 나만 알 수 있으므로.



참고도서 :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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