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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Jun 30. 2020

30개의 다이어리는 나를 향한 연애편지

기록은 기억보다 강하다

쓰는 인간


학교에 다녀와서 잠을 자기 전, 알림장에 적힌 숙제를 끝내고 그 날 하루의 일기를 쓰는 게 초등학생인 나의 일과였다. 다음 날 선생님 책상에 일기장을 올려두면 선생님은 바쁜 쉬는 시간을 쪼개어 코멘트를 써주셨다. 저학년 때는 그림일기를 썼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줄 노트에 날짜 요일 날씨를 체크하고 곧바로 글을 쓰는 것이 일기가 되었다. 정말 쓸 말이 없거나, 하기 싫어서 대충 쓰기도 했지만 칸을 채워서라도 일기를 썼다. 고학년이 되자 해야 할 숙제 목록에서 일기가 사라졌다. 이제 일기 쓰기는 학교 숙제를 위해 해야 하는 게 아니라 쓰고 싶다면 쓰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해서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일기를 쓰고 싶었다. 나는 문구점에서 300원짜리 일기용 노트가 아니라 6,000원짜리 다이어리를 직접 사기 시작했다.


하지만 쓰고 싶은 마음과 쓰는 행위는 같은 게 아니었다. 일기를 쓰기 위해 다이어리를 샀지만 예쁜 스티커를 사모아서 수집해 두거나, Mr.K잡지에서 부록처럼 제공하던 6공 다이어리 속지를 가위로 오려 차곡차곡 모아두는 곳으로 바뀌는 등 내 얘기가 없는 일기가 되기도 했다. 다이어리를 새로 선물 받거나 노트를 새로 사면 내 일기장을 3개나 바꿔가며 여기 찔끔, 저기 찔끔 쓰는 일기가 모아지기도 했다. 주객이 전도된 일기 생활(?) 속에서도 책상에 앉아 슥삭슥삭 무언가를 썼던 덕분에, 화려한 속지 위에는 소박한 나의 일상과 감정이 적혀있다. 11살의 나는 미술 선생님과 시내에서 밥 먹고 스티커 사진을 찍는 데이트로 행복한 하루를 보냈었는데, 기록이 없었다면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록은 기억보다 강하다


거의 20년 치의 기록을 살펴보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자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정성을 들여 파편화된 기억을 연결하고, 세심하게 들여다보니 "기록은 기억보다 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기록하니 좋은 점, 기록으로 느낀 점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


1.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내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살다 보면 일 하느라, 방황하느라, 노느라 이래저래 기록할 시간이 없었다는 핑계가 생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기록하게 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떤 상황에 있을 때 행복한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은 인생에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할 시점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10살의 나, 20살의 나, 30살의 나는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모습이 있었다. 그중에서 '발전 지향'과 관련된 두 가지 모습을 찾았다.


첫째, 목적이나 목표가 생기면 돌파한다.

둘째, 디테일에 민감하다.


10살의 나는 새벽 2시에 잠들지 않고 과학 경진대회 포스터를 그렸다. 내가 그린 아인슈타인은 서툰 그림체였지만 완성이라는 깃발을 꽂았다. 도화자의 중심부에서 가장자리까지, 내 마음에 들 때까지 덧칠을 반복하며 사소한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26살의 나는 공부만 하며 몸과 마음이 편한 것들과 안녕했다. 입가에 구각염을 달고 살았고, 손의 굳은살은 하루가 다르게 딱딱해졌다. 공부하다가 조금이라도 의문이 드는 지점은 알 때까지 물고 늘어졌다. 만약 그날 의문점을 해결하지 못하면 '다시 풀어봐'라는 포스트잇을 붙이고 넘어갔다. 99'c의 물이나 100'c의 물이나 뜨겁기는 매 한 가지이나, 물이 끓는 지점은 100'c이다. 임계점을 넘어본 경험이 없다면 전문가가 아니다. 그렇게 사소한 것들을 채워가며 영어 선생님이라는 타이틀에 깃발을 꽂았다. 30살의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1년 내내 고민했다. 노력이 목표에 닿지 못해 인생의 공허함이 컸다.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책을 읽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책은 나의 생각과 고민을 거울처럼 비춰주었고, 글쓰기는 감성을 드러내 주었다. 나는 나 스스로를 납득할 수 있는 실존이라는 깃발을 꽂아야 했다.


나는 반할 수 있는 목적을 따라 노력할 때, 고되지만 성장하고 있을 때, 디테일을 채워갈 때, 감수성을 이해해 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음미하는 사람이다. 단 한 번도 같은 순간은 없었고 때에 따라 단편적인 모습이 변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기질은 변하지 않았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이런 내 모습을 문장으로 정리하는데에 더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한지, 어떤 사람과 함께 할 때 안정감을 느끼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어떤 감각이 채워질 때 평온한지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덕분에 나의 가치가 드러나지 않고 성장에 방해가 되는 직장을 포기했고, 행복하지 않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사람들과도 작별했다. 중대한 선택을 할 때 힘을 실어 주는 아이디어기록에서 나왔다.


2. 쓰니까 이루어지는 원리

2010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너무 심심해서 매대에 있는 책 하나를 꺼내 읽었다. 김수영 작가님의 「멈추 마, 다시 꿈부터 써 봐」라는 책이었다. 그 책을 읽고 며칠 뒤 집에 굴러 다니는 A4 용지에 번호를 매겨가며 이루고 싶은 일들을 썼다. 그게 내 인생의 첫 번째 버킷리스트였다. 연필로 휘갈긴 종이의 내용들을 다음 날 학교 PC실로 가서 한글 파일로 정리했다. 목표를 이루고 싶은 년도를 쓰고 왜 이루고 싶은지도 썼다. 며칠을 정성 들여 쓴 다음 최종본을 프린트했고, 그 목록을 기준으로 매년 새로 쓰는 다이어리 맨 앞장에 <2010년>에 할 계획들을 정리했다. 계획을 짜고, 실행하고, 노력을 하기 위한 기본 프레임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의식이나 노력 없이도 이루어지는 일들도 분명하게 생겨났다.


<노력과 의식을 더해 기회를 잡은 것 중 하나>

: 독일 파견교환학생

원래 계획대로라면 2012년 9월에 시작하려고 했으나 마음속 직감을 믿고 따라갔더니 2011년 9월에 시작할 수 있었다. 만약 시험 접수 당일 날, 내 마음속의 믿음보다 타인이 세운 실력이라는 기준(쪽지 시험 점수, 이전 성적)을 믿었다면 1년이나 앞당길 수 있었던 유학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력이나 의식 없이 했지만 나중에 보니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

: 우수 교육일지 수상

교육실습생이었던 나는 우리 반 애들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멋진 교생 선생님들과 벅찬 감동이 넘치는 4주를 보냈다. 인생에 그렇게 행복한 날이 또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최고의 순간이었다. 교육실습일지는 의무적으로 기록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행복을 잊기 싫은 마음에 사소한 순간마저 깨알같이 기록했다. (실습일지 수상식이 있다는 사실은 실습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 실습이 끝나고 나서 일지를 본부에 제출할 때 알았다.) 상을 받기 위해 일지를 쓴 건 아니지만, 제출하고 보니 우수상을 받았고 나중에 버킷리스트를 보니 교육실습을 잘해서 모범 표본을 하나 남기라는 목표가 적혀 있었다. 그 표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적지 않았는데, 일지를 쓰고 수상을 받았으니 원하는 것을 비슷하게 이뤘다는 생각을 했다. (더 행복했던 점은 함께 교육실습을 했던 친구도 수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실습학교가 같은 두 사람이 400명이 넘는 실습생들 중에서 각각 1, 2등을 수상했다. )


「시크릿」이라는 책의 원리가 이런 것인가? 원하는 바를 생각하고 난 후, 의식하지 않고 그냥 두면 알아서 택배가 배달 오듯 이루어질 거라는 게?


자기 자신만을 원하고, 자신의 운명만을 원할 수 있다는 데미안」의 말처럼, 개개인은 각자가 다른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원리로 사는 것 같다. 이에 더해, 무엇인가를 간절히 필요로 했던 사람이 그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연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혹은 자신의 소원과 필연이 그곳으로 자신을 이끌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다. 원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면 내가 편향적으로 만들어버린 이미지나 사건으로 일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내가 해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하다 보니 노력을 하게 되고, 노력에 대한 결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면 마치 '우연찮게' 이뤄낸 목표가 되는 것이다. (다만, 하늘의 뜻은 하늘이 정한다. 3년간 고군분투했으나, 유일하게 이룰 수 없었던 실패 카드는 임용시험이다. 또한 천재지변, 불의의 사고, 로또와 같은 행운은 범우주적 혹은 초자연적인 측면이라 내가 말할 수 있는 식견이 없다.)



이불 킥 할 만한 내용만 가득해서 오글거림을 참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빠르게 종이를 휘리릭! 넘기는 순간, 공부하는 동안 스스로를 다그치느라 가혹한 채찍만 쓴 일기 때문에 다음장을 넘겨보기 무서운 순간, 때로는 빈 공간이 난무한 공간을 넘기며 이때는 왜 기록을 하지 않았지? 하는 의문스러운 순간을 손으로 집어가며 "애썼다."라고 말해본다.


노력, 우연, 목표, 목적, 성장, 발전, 사랑, 감동.. 내가 나를 기록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역사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알고 살 수 있었을까? 기록은, 기억보다 강하다.





감성이 강한 사람의 기록


나는 버튼만 누르면 명령어 A를 수행할 수 있는 체계적인 메커니즘을 가진 인간이 아니다. 출근길에 길고양이를 만나면 간식을 짜주는 변수를 기어이 선택하는 감정적인 인간이다.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는 기록을 하는 이유는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특별하다고 여기며, 그와의 순간은 유일무이한 찰나에 존재하므로 이 시간을 기억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 기록을 남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시간의 관리 범위를 설정하고 스스로를 경영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계획 성취 여부를 체크할 때 만족스럽지 못한 날이 더 많으면 스스로를 비난하기도 했지만 지킬 수 없었던 계획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나니 스트레스가 줄어들었다. 6년 전 대형마트에서 설날 행사 아르바이트를 할 때, 한 부장님이 직원들에게 일정을 안내하던 중 "계획은 원래 안 지켜지니까 계획이다."라고 말하며 부담을 줄여주던 멘트가 생각난다. 삶에서 실패를 겪고 나니, 사실의 실패와 감정의 실패는 다른 영역이라는 것을 나의 일기로 증명한다. 시도해본 모든 것들에 대한 생생한 역사들. 나의 기록은 나를 이루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진심 어린 연애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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