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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고 걷는데 한 남자가 우산을 씌워줬다

by 슬기

때는 2006년 태풍 '개미'가 전국에 장맛비를 뿌리던 여름이었다. 학교 보충수업을 마치고 동아리 멤버들과 함께 곧 있을 축제를 준비했다. 하늘은 잿빛으로 점차 흐려지는데 비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집에 갈 때까지는 비가 오지 않을 거라는 기대를 하며 일정을 마무리하는데 그제야 수상한 소리가 들린다.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빗소리가 이제야 들리는 것이다.


창문을 넘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니 보슬보슬 이 아니라 우르르 쾅쾅 이 더 잘 어울리는 수준이었다. 우산은 없었으나 장마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집에 같이 가던 친구의 어머님께서 우산을 가지고 데리러 오신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 내 친구, 친구의 어머님 셋은 중형 우산 하나에 몸을 끼워 넣고 얼굴만 빼고 가려지지 않는 비를 맞으며 정신없이 집으로 갔다.


친구의 집은 우리 집보다 멀어서 중간 지점에서 나는 집으로 가는 방향을 바꿔야 했다. 육교를 건너, 한 5분만 걸으면 집이니까 빨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지 않고 "저는 이제 여기서 뛰어가면 돼요!"라고 말하며 우산의 품을 떠났다.


손으로 머리 위를 감싸고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인사만 하고 육교를 건넜다. 친구와 친구 어머니의 시선이 의식되어서 일단 뛰는 척은 했는데 나는 사실 급한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시야를 벗어난 순간 속도를 늦추며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사잇길이 보이자 내 걷는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머리 위로 올린 손은 어차피 우산 역할을 하지 못하니 팔을 내렸고, 굵은 빗방울이 눈에 닿으니 빗물 때문에 시야도 가려졌다. 아무도 걷지 않는 이 사잇길에서 천천히, 조금은 뒤뚱뒤뚱 걸으며 마치 샤워할 때 드는 멍한 기분으로 빗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빗소리의 정적을 깨는 굵은 목소리가 들리며, 빗방울은 더 이상 내 눈을 가리지 않았고 내 왼쪽에 누군가가 서는 느낌이 들었다.

살짝 긴장한 채로 고개를 돌리니 웬 남자가 우산을 씌워주며 말을 건다.



왜 비를 맞고 가세요?

왜 비를 맞고 가냐는 질문에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아,눼..네..우..사ㄴ.." 정도로 말을 얼버무렸다. 우산이 없어서 비를 맞고 가는 건데, 처음 보는 사람이 우산을 씌어주는 상황에서 "제가 우산이 없거든요!"라고 명랑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그 남자가 씌어주는 우산에 발걸음 맞추며 사잇길을 함께 걸었다. 잠깐의 마주침에도 큰 키에 흰 얼굴, 비를 맞아서 젖은 머리와 교복이 눈에 보였다. 그 사람은 아파트가 밀집된 이 동네에서 수많은 세대 중 한 세대에 사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나와 학교가 멀지 않은 옆 학교에 다니는 남학생이었다.


빗소리와 그 남자, 그리고 나만 있는 사잇길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지만 천천히 걷다 보니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오른쪽 통로가 보였다. "저.. 제 집이 이... 쪽이라"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며, 손으로 내가 가야 하는 방향을 쭈뼛쭈뼛 가리켰다. 나는 백스텝을 밟으며 점차 우산에서 벗어났고, 그 남자는 나의 방향을 따라 우산을 내쪽으로 기울였으나 어색함을 참지 못해 “고맙습니다!!!!!!!!!"라고 소리치며 호다닥 뛰쳐나갔다.


다음 날, 빗속에서의 이 사건을 동아리 사람들에게 말했더니 한바탕 난리가 났다. 너는 진짜 바보가 아니냐면서- 그런 일이 있었으면 8월에 있을 축제에 꼭 오라고 말했어야 했다고, 그게 아니면 이름과 번호라도 물어봤어야지 그걸 그냥 오면 어떡하냐는(?) 말이었다. 그런가? 듣고 보니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태풍이 치던 날, 굵은 비를 만끽하는 옆 학교 여학생을 보며 그냥 지나치지 않고 우산을 씌어준 남학생과의 얘기는 이렇게 엔딩이었지만- 혹시 내가 먼저 집까지 데려다 달라고 말했거나, 도도도 뛰어가는 나를 보고 그 사람이 끝까지 우산을 씌워주겠다고 따라왔다면 얘기가 달라졌을까?


매일 지나다니는 사잇길이지만 장마가 찾아오니 그때가 생각난다. 괜스레 낭만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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