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비비안에서 조던

화제 이어 보기 02

by yabanhama

비비안은 평생을 뉴욕과 시카고에서 보모로 지내면서 만 오천 통이 넘는 필름 롤을 남긴 특이한 인물이다. 이 필름 롤은 비비안이 사망하기 두 해 전인 2007년 경매를 통해서 존 말로프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그 이유는 스토리지 임대료를 체납했기 때문이었다. 스토리지 업자가 임대료를 보상받으려고 필름을 경매에 내놓은 것이었다. 그 이후 존 말로프의 호기심과 열정으로 비비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남을 통해서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긴 하지만, 극적인 이야기가 배경이 되어 엄청난 주목을 받기도 한다. ‘H마트에서 울다’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미셸 자우너로 유대계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룹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이다. 격동의 10대를 보낸 미셸은 대학을 마치고 그룹 활동을 하면서 서서히 한국인 어머니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 시점에서 어머니의 암 투병 소식을 듣는다.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 나라인 한국 문화와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달라지고 있던 미셸은 만사를 제쳐두고 고향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의 항암을 간병하게 된다. 미셸의 어머니 이정미가 바로 'H마트에서 울다'라는 책이 없었다면 결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사람이다.


이정미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 호텔 안내원으로 일하다가 취업 기회를 찾아 한국에 온 미셸의 아버지를 만나 3개월 만에 결혼했다고 한다. 미셸은 1년 후 서울에서 태어났고 5세 무렵 가족이 모두 미국으로 가면서 미국 아이로 성장하게 된다. 이정미는 미국의 외딴 농장(도시에서 10킬로 미터 떨어짐)에서 미셸을 키우면서 가정을 꾸려나가는 전업주부로 살아가지만 자녀 교육에서만은 전형적인 타이거맘이었다. 미셸이 다치거나 아파하면 늘 우는 아이를 책망하고 울음을 당장 그치라고 다그쳤다. 고등학교 졸업반 시절 극도의 반항을 보였던 미셸을 어르고 달래서 기어코 미국 동부 명문 사립 여자대학에 진학시킨 것도 역시 엄마였다.


이런 엄마가 이정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쟁같은 맛’(the taste like war)에 등장하는 군자 역시 미국인 남편을 따라 물 설고 낯 설은 이국에서 억척스럽게 살다가 조현병에 걸려서 넘어진다. 그녀의 딸 그레이스는 군자의 일생을 복기하는 작업을 통해서 박사 학위 논문을 완성한다. 이정미는 암을, 군자는 상처받은 과거(한국에서 양공주)에서 비롯된 우울증을 극복하려다 결국은 비운으로 생의 마지막을 보내게 된다. 미셸과 그레이스는 딸의 시선으로, 한편으로 미국인의 시선으로 한국인 엄마를 바라보고 사랑을 글에 담았다.


시선의 중요성을 일찍이 알아낸 철학가가 있으니 바로 시몬 베유이다. 그녀는 관심(attention)을 중요시하였다. 관심이 바로 사랑은 아니지만 관심을 거두는 순간 사랑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고 보았다. 심지어 관심 없이 시간을 주는 것은 가장 잔인한 사기라고 몰아붙였다. 우리는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건성'으로 보내는가?


남을 통해서 사후에 명성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진면목이 밝혀져 명예를 잃게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 초대 학장이면서 해양생물학에 크게 기여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 박사의 경우이다. ‘물고기는 없다’라는 책을 통해서 그의 행적에 대한 의문이 공론화되고 심지어 일부는 사실로 확인되면서 그의 이름 따라 붙였던 건물 명칭이 스탠퍼드 대학 캠퍼스에서 사라졌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보슬비에서 비비안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