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에서의 대표자의 역할

지루한 회의 의미 있게 만들기5

by 배성민

회의에 참여하는 것과 회의를 주재하는 대표자가 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회의에 참가할 때는 주로 문제를 제기하거나 건의를 하는 입장이었다. 대표자는 단순히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자리에서 바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방향을 제시하고 의견을 절충해 나갈 의무가 있다.


작년 노조에 방송차를 구매하고 운영규칙을 운영위원회 성원들과 만들었다. 노조 운영위원회는 각 현장 대표자(지회장)들이 매달 모여 노조의 주요한 결정을 하는 단위다.


기존 중고방송차는 구입한 지 5년 만에 뻗어버렸기 때문에 엄격한 기준을 통한 철저한 관리가 필요했다. 규칙은 단순했다. 노조에서 결의한 사업에 차를 사용하고, 외부 대여를 제한했다. 단 민주노총 각 산별 및 사회운동 단체에서 집회 시 행진 때 필요한 방송장비를 위한 대여는 가능하게 정했다.


논란은 조합원들이 타 노조 현장에 연대를 가기 위한 이동수단의 목적으로 방송차를 빌려달라는 요청으로부터 시작됐다. 기존 규칙은 조합원 또한 이동 수단의 목적으로 방송차를 대여할 수 없었다. 문제를 제기한 조합원은 규칙이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상근 간부들이 바빠 챙기지 못하는 타 노조 투쟁사업장을 조합원들 스스로 가겠다면 적극 지원하는 게 맞다는 논리였다.


사무국장 시절이었으면 딱 잘라 안된다고 말하고 거절하거나 위원장에게 보고해서 판단을 미뤘을 것 같다. 하지만 대표자가 된 마당에 조합원들의 요청에 빡빡하게 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규칙을 어기는 것도 맞지 않았다. 결국 방송차 규칙을 정했던 운영위원회에 기타 안건으로 올려 규칙을 다시 한번 검토하기로 했다.

보통 운영위원회는 정보전달의 목적으로 회의가 진행된다. 40~50여 명이 동시에 회의를 진행하기 때문에 토론보다 주요 사업을 공지하는 목적이 크다. 보통 회의 주재자가 정보를 전달하고 일부 질의응답을 하고 끝나는 식이다. 쟁점이 되는 안건에 대해 토론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논쟁을 하더라도 소수의 운영위원만 질문과 의견을 말하는 정도였다.


방송차 안건은 정보전달 성격의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쟁점을 미리 전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많은 운영위원들의 의견을 통해 규칙을 재검토해야 했다. 함께 이용하는 채팅방을 통해 내용을 미리 공유하고 당일 회의에 기타 안건으로 상정했다. 톡을 보지 않는 운영위원들에게는 개별 문자를 보내서 내용을 미리 숙지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당일 토론은 뜨거웠다. 다수의 조합원들은 이전 방송차가 관리가 잘 안돼서 수리비도 많이 들고 폐차도 빨랐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기존 규칙을 유지하여 새로운 방송차를 오래 써야 한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소수 몇몇이 그럼에도 조합원들이 투쟁 지원을 하는 활동에 방송차를 지원하지 않는 것은 노조 활동 취지에 맞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다. 기존에 말을 하지 않는 운영위원들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그만큼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공통의 주제였다.


계속 토론만 한다고 답이 나올 순 없었다. 적절한 절충안이 필요했다. 대표자로서 칼로 무를 자르듯 싹둑 잘라서 결론을 낼 수는 없었다. 두리뭉실하게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출구전략이 필요했다. 나는 상근 간부들이 바빠 가지 못하는 투쟁에 조합원들이 손선수범해서 가겠다는데 이번만 예외로 두고 박수를 치고 넘어가자고 제안했다. 엉렁뚱땅 넘어가 문제를 제기한 쪽도 규칙을 고수하는 쪽 모두 의견을 포용하려고 했다.


운영위원 K가 손을 들고 지금 이 사안에 대해서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또 비슷한 문제로 우리가 시간을 낭비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위원장의 훈훈한 마음은 알겠으나 규칙을 제대로 정해두자는 입장이었다. K의 제안은 미리 운영위원회에 승인을 받자고 제안했다. 조합원이 운영위원회의 승인을 얻으면 이동의 목적이라도 방송차를 대여할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절묘한 절충안이라 고민없이 의견을 수렴했다.


운영위원회 토론을 통해 규칙을 수정하고 방송차를 지원했다. 이번 논의를 돌아보며 자칫했으면 결론 없고 논쟁만 난무한 회의가 될 뻔했다. 다행히 회의 전 쟁점을 전달받은 운영위원들이 미리 자신의 의견을 준비해 절충안을 제시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대표자는 첨예한 논쟁에 대해 절충안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이번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꼭 한 가지 방향을 고수할 필요는 없다. 다양한 의견을 토대로 몇 가지 절충안을 준비하고 구성원들과 토론을 하여 결론을 도출하면 된다. 단 회의 분위기에 휩쓸리기보다는 합리적인 절충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대표자의 역할이다.


늘 어려운 논쟁과 판단을 앞두고 고뇌하는 대표자 동지들께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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