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겨울 부산일반노조에 일을 시작하고 그와 함께 같은 일을 했다. 노조 일하기 전에도 나와 그는 단체 대표자로 투쟁현장에서 자주 마주칠 일이 많았다. 부산지역 집회와 기자회견을 통해서 본 그는 노조 위원장으로 앞에 나서서 발언하는 일이 많았다. 차분하고 점잖으면서도 힘이 있는 목소리를 뿜어내어 발언 때마다 인상 깊었다. 실제로 일을 같이 하게 되었을 때도 대단한 활동가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뛰어난 활동가는 아니었다.
노동운동에 입문해서 어리바리한 나에 대해 잔소리나 지적 한 번 안 했다. 처음에는 무관심하다고 느꼈다. 처음 하는 사람에게 다양한 팁도 주고 어떻게 해야 할지 이끄는 게 선배 활동가의 역할 아닌가 라고 오해했다. 어느 날 그가 조심스럽게 내가 걱정되었는지 차를 타고 가면서 슬쩍 물었다.
“조직부장 요즘 어때요?”
부산일반노조 바쁜 여정 속에서 내가 적응을 잘하는지 걱정이 되는지 물어왔다. 당시 나는 크게 노조 활동이 힘들지는 않았지만 내가 잘하고 있는가 싶어 걱정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차근차근 조합원들에게 다가가면 노조 활동이 크게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하다 보면 다 잘되니 스트레스받거나 어려운 일 있으면 무조건 이야기하라고 강하게 말했다.
“조합원들에게 뭔 일 없어도 일상적으로 전화하는 버릇을 들이는 게 좋아요. 자주 소통하다 보면 조합원들 신뢰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다 보면 스트레스 정말 많이 받게 될 텐데 그거 안 풀면 병 돼요. 꼭 저나 위원장님에게 이야기하세요. 아니면 큰일 납니다.”
그는 대단한 활동가처럼 조합원들을 진두지휘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좀 의아했다. 조합원들에게 정확히 활동 방향을 제시하고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게 노조 간부의 역할 아닌가 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는 조합원들과 서슴없이 지냈다. 나이와 성별과 상관없이 조합원 누구와도 농담 따먹기를 하며 친구같이 지냈다.
진보운동을 하면 대중을 가르치려는 선생이 많다. 나도 마찬가지다. 활동가로 살면서 대중을 가르치려고 할 뿐 그들과 어울리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일하며 나의 방식이 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가르치기보다는 함께 어울리며 친구같이 지내는 태도가 조합원들에게 울림을 줬다. 조합원들의 시시콜콜한 고민 상담은 그의 몫이었다.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어도 늘 경청하며 조합원들의 이야기에 공감을 해줬다.
뛰어난 진보운동가들은 결국 자신의 능력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기 위해 운동 경력을 부정한다. 진보운동이 희망이 없다며 보수정당과 대기업 이사진으로 들어가기 위해 바쁘다. 그들은 대중과 함께 하기보다 자신이 뛰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을 자신 중심으로만 바라본다.
하지만 전규홍은 평생을 가장 낮은 노동자와 함께 하기 위해 살아갔다. 노동자의 벗이라는 말이 이와 같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보다 조합원을 더 챙겨 늘 주변 사람들에게 "본인 좀 챙기세요!" 라는 잔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자신의 밥은 안 챙기면서 다른 사람 밥 값을 계산하는 사람, 술로 아픈 동지에게 단호하게 술을 주지 말라고 주변 동지들에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능력 있는 사람보다 전규홍과 같은 참의로 인간다운 노동운동가가 있었기에 세상은 조금이라도 진보하고 있다.
너무나 아까운 사람이 먼저 갔다. 이제 그와 일한 지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와 이별하는 게 너무 슬프다.
아직 죽음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해 장례가 바로 치러지지 않는다. 전규홍 동지가 가는 길이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다. 긴 여정에 동지들이 끝까지 함께해주기를 부탁한다. 매번 노동자 농성 투쟁때 마다 그와 함께 외치던 구호가 있다. 그의 죽음을 밝혀내는 싸움, 그가 평생 이루려고 했던 노동해방 평등 세상을 쟁취하기 위해 끝까지 함께 투쟁하자.
"끝까지 투쟁하면 반드시 승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