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이 하루키

by 벼룩스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을 함께하고 있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요. 멀리서 보면, 그것은 유성처럼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수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거죠. 두 개의 위성이 그리는 궤도가 우연히 겹칠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 볼 수 있고 어쩌면 마음을 풀어 합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건 잠깐의 일이고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 속에 있게 되는 거예요. 언젠가 완전히 타버려 제로가 될때까지 말이에요.

-P197-


스미레는 옆에 있는 뮤의 나체를 떠올리고 그녀를 안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기대가 있고, 흥분이 있고, 포기가 있고, 망설임이 있고, 혼란이 있고, 두려움이 있었다. 마음이 부풀어 오르기도 하고 오그라들기도 한다. 모든 것이 잘 될 것 처럼 여겨지기도 하고, 아무것도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P214-


우리는 이렇게 각자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심하게 치명적으로 자신을 잃어버렸다 해도, 아무리 중요한 것을 빼앗겼다 해도, 또는 겉면에 한장의 피부만 남긴 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버렸다 해도, 우리는 이렇게 묵묵히 삶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손을 뻗어 정해진 양의 시간을 끌어모아 그대로 뒤로 보낼 수 있다. 일상적인 반복 작업으로서 - 경우에 따서는 매우 솜씨 있게.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매우 우울한 기분이 되었다.

-P347-


간만에 하루키 소설을 읽었다. 좋았다. 흔히들 하루키의 소설을 상실의 미학이라고 한다. 현실과 이상의 분리된 세계에서 완전함을 꿈꾸지만,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고 결국에는 무언가 잃어버린, 상실해 버린,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또는 살아내야 하는 삶의 모습을 하루키는 항상 그려낸다. 그러나 그는 고독과 상실을 부정하지 않고, 고독과 상실 (혹은 단절)이 자아(소설의 주인공)를 성장하게 (또는 성숙하게) 만드는 불가피한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나 또한 그러한 과정이 필요함을 다시금 느끼게 만드는 소설이다. 잃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나아가야 하는 것이, 삶의 모습이자 삶의 본질 인 것 같다. 마치 시지프스 처럼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E.H. Gombrich The Story of 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