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신에 반하다

단편동화- 도서관 이야기 1-

by 배나무

단편동화 -꽃신에 반하다-


겨울 방학식을 하던 날, 엄마는 아람 미술관에서 아프리카 사진 전시가 있다며 함께 가자고 했어요.

좀 쌀쌀하긴 했지만 모자 쓰고 목도리도 두르고 동생 수현이랑 장난치면서 미술관까지 걸어갔지요.

그런데 미술관 옆 도서관 앞을 지날 때, 5학년쯤 돼 보이는 어떤 언니가 자전거 앞 바구니에 싣고 가는 책이 보였어요.

바구니 속엔 여러 권이 있었는데 맨 위의 책 표지에 있는 그림엔 빨간 두루마기와 빨간 비단신을 신고 있는 여자 아이가 꼭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어요.

난 단박에 그 책한테 마음을 뺏겨 버렸죠.

아마도 그 언니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가는 것 같았어요.

미술관에 들렸다가 도서관에 가면 누군가가 그 책을 먼저 빌려 갈 것 같아 조바심이 났어요.

단박에 내 마음을 뺏는 책이 그리 흔한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엄마에게

"엄마! 난 도서관에 들려서 책부터 빌리고 싶어."

하고 말했어요.

"책 들고 다니면 불편할 텐데?"

"아냐, 딱 한 권이면 돼. 수현이랑 먼저 미술관 가. 금방 갈 게."

"그럴래? 그럼 얼른 빌리고 와."

옆에 있던 동생 수현이는 깐죽거렸어요.

"어이구~ 만날 책은 끼고 살면서 또 뭐가 보고 싶은 거야?"

난 수현이에게 혀를 날름 내밀고 얼른 도서관으로 들어갔어요.

자전거를 묶고 어린이 자료실로 가는 언니보다 먼저 가서 기다렸다가 얼른 빌리려고요.

도서관 안은 방학이 시작되어 그런지 아이들이 꽤 많았어요.

나는 도서관 안쪽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안내대 옆에서 그 언니가 들어오는 걸 기다렸어요.

금세 그 언니가 들어와 자동으로 대출 반납을 처리해 주는 네모 모양의 까만색 기계 위에 책을 올려놨어요.

내가 홀딱 반한 책은 맨 아래로 내려가고 그 위에 세 권이 더 얹혀졌죠.

"반납이요."

그러자 사서 선생님이 컴퓨터 화면을 보며 말했어요.

"처리됐어요."

그리곤 책들을 안내대 옆에 있는 수레에 올려놨어요.

난 얼른 한 손으로 그 책을 집어내며 주머니에서 대출증을 꺼냈어요.

"이거 지금 대출할 수 있죠?"

사서 선생님을 나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어요.

빌린 책을 두 손으로 곱게 들고 표지 그림을 자세히 봤어요.

하얗게 눈 내린 절 마당 같은 곳에 여자 아이가 서 있어요.

그 아이가 신고 있는 신발은 연두색 코에 노란 꽃무늬가 있는 빨간색 비단신이고 앞을 빤히 보고 있어요.

그런데 그 두 눈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고 마치 나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 듯 입술이 조금 달싹하는 같았어요.

'이렇게 곱게 차려 입고 왜 그렇게 슬픈 거야?'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까지 들었어요.

책 속 아이와 눈을 맞추고 가만 서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사서 선생님이 물었어요.

"왜? 이렇게 추운 날엔 저런 조바위라도 갖고 싶어?"

"조바위요?"

"그림 속 아이가 머리에 쓰고 있는 거. 예쁘지?"

"네에- 정말 그래요. 두루마기도, 꽃신도 이 애 표정도......."

사서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어린이 열람실을 나오면서 갑자기 마음이 급해져서 책장을 넘겼어요.

속표지엔 책 제목과 함께 노란 민들레가 꽂힌 짚신 그림이 있어요.

그다음 장엔 차례. 그다음엔 또 멋진 풍경 그림이 있어요.

구불구불 높게 올라가는 계단과 그 위에 하얀 눈이 덮인 기와집과 눈꽃이 활짝 핀 겨울나무들이 보여요.

눈이 가득 내린 풍경은 모든 소리를 잠재워버린 듯 고요하게 느껴지고 연한 보랏빛 광채까지 뿜어내는 거 같아요.

나는 책장들을 넘기며 꼼꼼히 살피느라고 걸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도서관 로비에 창밖을 향해 두 줄로 늘어놓은 소파에 앉았어요.

창밖엔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하는데 나는 계속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갔어요.

'선예'는 대갓집 달이고 '달'이는 역병으로 부모를 잃고 골짜기 화전마을에서 혼자 사는 아이이다.

선예는 열두 살이 되어 처음으로 어머니를 따라 어머니가 다니는 절로 나들이를 간다.

그런데 절에 채 다다르기도 전에 뒤쫓아 온 청지기에게 아버지와 오빠들이 군졸들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머니는 유모에게 선예를 맡기고 한양으로 돌아간다.

절에 남은 선예는 어머니에게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지만, 소식은 없고 함박눈이 내린 날,

대웅전 앞뜰에서 버선도 없이 짚신만 신고 눈을 쓸고 있는 달이를 만난다.

선예는 달이가 신기하지만 달이는 예쁜 꽃신을 신은 선예가 호기심 어린 질문을 자꾸 하자 비위가 상해서 싸리비를 팽개치고 가버린다.

얼마 후 강원도 두메산골로 피신해야 한다며 유모는 달에게 옷과 신을 팔라고 한다.

달이는 돈 대신 선예의 꽃신을 달라고 하는데 선예는 아버지에게 받은 꽃신만은 줄 수 없다고 버틴다.

그러다 달이는 스님에게 선예가 사흘 동안 손에 물집이 생기도록 절 마당을 쓸었단 얘기와

부모님 위패를 모신 절에 공양하는 달이의 모습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단 얘길 듣는다.

다음 날, 선예는 댓돌 위에 놓인 보따리와 말린 민들레꽃을 엮어 만든 짚신을 발견한다.

선예는 천왕문 아래 돌계단으로 내려가고 있는 달이를 불러 세워서 꽃신을 내민다.

선예 아가씨는 하얀 무명치마를 입고 민들레가 엮인 짚신을 신고 타박타박 유모 뒤를 따라서 산골짜기 좁은 길로 걸어갔겠죠?

내 눈앞에 선예 아가씨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어요.

눈을 감았어요.

아가씨는 뒤를 돌아 산 위의 천왕문 지붕을 한 번 쳐다보고, 달이가 사는 화전마을 쪽도 한 번 보고 그리고 짧은 몽당치마 아래 노란빛 민들레 꽃신도 내려다봤어요.

"아가씨! 잠깐만요!"

"응? 아 수민이구나."

나는 부러운 듯 선예 아가씨가 신고 있는 민들레 꽃신을 가만 들여다봤어요.

"있잖아요, 이 꽃신 정말 예뻐요. 그 빨간 비단 꽃신도 예쁘지만 이게 훨씬 멋져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아마도 예쁜 마음까지 엮여서 그럴 게야."

"나도 한 번 신어보고 싶어요."

"뭘 하고 싶다고? 수민 씨, 정신 차리셔!"

깜짝 놀라 눈을 떴어요.

어머나 세상에! 내가 잠을 잤나 봐요.

엄마랑 수현이는 미술관을 한 바퀴 돌고도 내가 나타나지 않자 도서관으로 왔고, 도서관 로비에서 잠꼬대까지 하는 나를 발견한 거예요.

엄마는 내 꿈 얘기를 듣고

"어머! 그거 근사하겠는데. 내년 봄엔 우리도 꽃들 좀 말려보자. 신발에 장식하는 건 어려워도 여름 모자는 꾸밀 수 있겠다."

옆에 서 있던 수현이는 내 얼굴과 엄마 얼굴을 번갈아 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혀를 끌끌 차면서도

“나도 끼워줘. 내가 만들기는 더 잘해!”

하고 큰소리쳤어요.



*이 동화에 인용된 책은 김소연 글, 김동성 그림,<꽃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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