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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나온 Sep 27. 2024

비가 오면 다리가 아픈 이유

비 오는 날의 공상

오랜만에 비가 왔다. 누군가에겐 반갑지 않은 손님이겠지만 나에게는 부슬부슬 오든 우당탕 오든 상관 없이 반가운 날씨다.  

    

모든 소리를 사로잡아 움켜쥐고 세상을 고요하게 만들어주는 빗소리를 좋아한다. 온 주변으로 비가 떨어지는 느낌을 감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차창을 손으로 만질 때 묻어나는 축축한 습기, 비가 오며 만드는 공기의 촉촉함 혹은 눅눅함까지. 비 오는 날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질감의 분위기를 좋아한다.

     

비가 오는 풍경엔 구스타프 말러(G.Mahler)의 교향곡 5번 아다지에토(Adagietto)를 선곡하면 완벽하다. 우아하게 일렁이는 음악을 듣고 있자면 물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다. 이 비가 바다에서 오는 것임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하늘에서 바다가 내린다.  

산에도 길에도 나의 내면에도

물결이 일렁인다.

태고부터 현재까지

수많은 내가 만나고 통합되는

나는 바다 속이다.     

    



바다를 좋아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물 위에 동동 뜨는 그 기분을 좋아한다. 물에 들어가면 주변의 소리는 다운되고 빛은 굴절되어 편안하고 고요하다. 물속에서 발을 휘저으면 몸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나를 참으로 의기양양하게 만든다.     

 

비가 오면 다리가 붓고 아프다.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고 처녀일 때도 순환이 잘 안되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었다. 다리가 아플 때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둥둥 뜨고 싶다. 눈을 감고 물속에 둥둥 떠 있으면 언젠가 바다에서 만났던 풍경들이 스친다. 영종도 갯벌의 알록조개, 경포대 해변의 높은 파도, 속초 바다 아래 빠르게 도망가던 물고기, 사이판의 산호초와 형형색색의 열대어, 하와이 깊은 바닷속에서 만난 커다란 거북.    

  

문득, 다리가 아플 때 왜 물에 들어가고 싶어질까를 생각해본다. 다리는 무거운 몸의 무게를 지탱하지 않아도 되니 좋을 것이다. 퉁퉁 부운 다리에게 왜 너는 너의 의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낑낑대느냐고 물어본다.

그럼, 다리가 말한다.  

   

“나는 사실 다리가 아니었어.”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했을 인어를 생각해본다. 유선형의 매끈한 몸으로 깊은 바다 밑에서 아름다운 춤을 추는 인어가 있다. 그는 첫눈에 반한 왕자와 함께하고자 인간이 되길 욕망했으며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버리고 두 다리를 얻는다. 하지만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슬픈 인어.

    

나는 인어의 평행우주를 생각해본다.

그는 인간의 세계를 동경하였기보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싶었다. 탐험의 도구로 두 다리가 필요했지만 목소리를 걸지는 않을 것이다. 마녀와는 풍성한 머리카락쯤으로 협상하고 매끈하고 쭉 뻗은 다리 대신 퉁퉁하고 잘 붓는 다리를 얻게 될 것이다. 다리를 얻어 뭍으로 나온 인어는 호화 크루즈에서 생일파티를 하는 셀럽 왕자는 거를 것이다. 대신 내면이 단단하고 선한 사람을 만나 아이는 둘쯤 낳아서 잘 먹고 잘살고 있을 것이다. 비가 오면 다리가 쑤셔서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동동 떠서는 바다를 그리워하겠지만, 그렇다고 현생을 후회하며 다시 바다로 돌아가려 하지는 않는다. 대신 휴가 때마다 바다를 찾아가고 오랜 시간 물에 동동 떠서 수영을 즐길 것이다.         

  

“여보, 나는 아마도 전생에 인어였나 봐.”

“............ 왜에?”

“비가 오면 다리가 아프거든.”

“........... 그래? ㅋㅋㅋㅋ 인어가 비가 오면 다리가 아팠어? ㅋㅋㅋㅋㅋㅋ”

“아니 ㅋㅋㅋㅋ 인어는 목소리를 잃고 다리를 얻었잖아. 대신에 걸을 때마다 다리가 엄청 아플 거라고 했어. 나는 비가 오면 유독 다리가 아프더라고. ㅋㅋㅋㅋㅋㅋ”

“아 ㅋㅋㅋㅋㅋㅋㅋ 그럼 전생이 아니네. 지금 인어인 거네. 인어 공주님.”  

   

비 오는 날 밤, 고된 하루를 마치고 함께 앉아서 나의 시답잖은 농담도 잘 받아주는 당신의 웃는 얼굴을 좋아한다.   

  

좀 더 살아본 언니가 열다섯 생일을 맞은 인어에게 해 주고 싶은 말.

마녀가 하는 얘기 다 맞는 얘기야.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사랑에 목숨을 걸지는 말자. 남자고 여자고 얼굴 뜯어 먹고 사는 거 아니란다. 삶을 함께할 사람은 삶을 함께한 후에 결정해야 해. 왕자의 세컨드인 채 정신 승리로 만족할 바엔 그냥 바다에서 공주로 살며 너의 책임을 다해. 이왕 인간이 되겠다 결심했다면, 사랑에 목매는 생으로 끝나지 말고 바다 위 쓰레기 섬이나 거북이 콧구멍에 박히는 빨대 문제를 해결하는 생의 과업을 가져 보자고.

너의 운명은 ‘왕자’가 아니라 ‘바다’야.  


        

다음에 오는 여름 휴가 때는 머메이드 스커트를 입고 바닷가에 앉아 안데르센 동화 원전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딘가의 평행우주에 있을 인어가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말>

1.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저는 우리 신랑 얼굴에 반해 사귀었습니다.

2. 그리고 말입니다. 그저 공상이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 나이에 인어공주라니.. 맙소사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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