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조금 감동>
그날은 설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아침을 잘 먹은 첫째는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드러누웠다. 나는 낑낑대는 첫째의 등을 (배는 아프다고 만지지도 못하게 해서) 삼백 번쯤 동글동글 돌려주었다. 그중 이백 번은 양손으로 돌렸다. 둘째가 자기도 해 달라며 배를 까고 같이 드러누웠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윷놀이를 한 후 폭풍 흡입한 아이스크림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따뜻한 꿀물을 타 주셨고, 첫째는 꿀물을 한 잔 먹은 뒤 똥을 한 번 싸고는 괜찮아졌다며 깔깔깔 팔짝팔짝 뛰어다녔다. 꿀물 한 잔에 다 죽어가던 아이가 금세 저리 바뀐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어쨌든 괜찮아진 아들과 함께 양손 가득 친정엄마가 싸 주신 음식을 싸 들고 우리는 집에 돌아왔다.
둘째의 어린이집 등원 준비를 할 참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연습한다며 알림장을 준비하라는 어린이집 안내에 내가 문구점에 가 알림장을 사 오겠다고 했더니 둘째가 외쳤다.
" 엄마! 나 문구점 체험해야 하는데!"
지난주 둘째가 독감으로 어린이집에 못 가는 동안, 어린이집에서는 문구점 체험을 했다. 친구들의 문구점 체험 사진을 사진으로 본 둘째는 자기도 문구점에 가서 친구들처럼 물건 세 개를 사겠다고 한다.
" 뭔소리여. 필요한 게 없으면 사는 게 아니여."
그랬더니 드러누워 찡얼대기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꿈쩍하지 않는다. 그런 엄마와 동생을 보고 있던 첫째가 툭하니 말했다.
"그럼 내가 사줄까? 엄마, 내가 모은 돈으로 사 줘도 돼?"
돈을 쓰고 싶거나 뭔가를 사고 싶은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평소 동생을 대하는 태도가 그다지 다정하지 않던 첫째가 둘째를 위해 뭘 사주겠다고 선뜻 나서는 모습에 나는 좀 감동했다. 물론 둘째가 느꼈을 감동에 비할 바 못하겠지만 말이다.
둘째는 천 원짜리 세 개를 살 거라고 했는데 첫째는 오천 원을 챙겼다. 천 원짜리가 있었음에도 삼천 원이 아니라 오천 원을 챙긴 그 마음도 좀 기특했다. 문구점에 가는 길은 셋 다 너무 신나서 룰루랄라 걸음으로 가다가, 말타기 뜀박질로 가다가, 사람들이 좀 많아지고 나서야 얌전히 걸었다.
문구점에 도착했다. 안타깝게도 알림장은 없었다. 내가 난감해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들은 문구점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여러 물건을 탐색했다. 둘러본 둘째가 사고 싶은 물건들은 전동 연필깎이, 권총, 조립해서 노는 장난감 같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개당 만 원이 넘었다. 우리 셋은 모두 조금 우울해진 듯했다. 둘째는 오천 원보다 더 싼 물건들을 찾으며 이리저리 가격표를 확인하는데 가까스로 찾은 맘에 드는 물건이 총, 칼 등의 장난감이어서 물건 구입에 까다로운 엄마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둘째가 물건을 고르는 시간이 길어지고 결정을 못 하고 있을 때 첫째가 말했다.
"엄마 나 똥 싸고 올게."
"어 다녀와."
조금 있다가 첫째가 돌아왔다.
"엄마 나 똥 쌌어."
"어."
"좀 많이 쌌어."
"어~"
"바지에다가 쌌어."
"어?"
아이고. 꿀물을 먹고 나았나 싶었더니……. 그만 화장실에 가다 실수를 하고 만 것이었다.
"워메 우짜냐. 집에 가자."
"……얘, 물건 사주고."
아. 나는 또 조금 감동했다. 똥을 바지에 싼 상황에서도 동생에게 물건을 사주는 것을 완수하고 싶은 그 마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나라면 그냥 얼른 집에 가고 싶었을 텐데…….
물건을 고르는 동생을 기다리며 어기적 서 있는 첫째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조급해져서 얼른 아무거나 산 뒤 집에 가고 싶었다.
"아무리 봐도 여기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은 네모 지우개뿐이야. 얼른 사고 가자."
지우개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을 수긍한 둘째는 빨간 네모 지우개를 살까 파란 네모 지우개를 살까 한참을 고민했다. 첫째는 두 개 모두 사주겠다고 했다. 아, 나는 또 조금 감동했다.
그렇게 지우개 두 개를 고르고, 둘째가 무인 기계에 지우개 바코드를 찍고, 오천 원짜리 지폐를 넣은 다음 거스름돈까지 챙겨 받았다. 요즘 애들의 가게 체험 학습은 무인 가게 체험이구나. 격세지감을 느끼며 내게도 첫 번째였던 무인 문구점 체험을 마쳤다.
집으로 가는 길에 첫째는 자꾸 뒤처졌다. 앞서는 둘째와 어기적거리는 첫째 사이에서 나는 자꾸 멈추게 되었다. 뒤돌아 첫째에게 가서 등을 쓰다듬고 손을 잡고 같이 걸었다.
문득 어릴 적 어느 순간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바지에 실수했었는데 내 동생은 그걸 두고두고 놀려 먹었다. 바지에 실수한 게 내가 아닌 것이 천만다행일 정도로 내 동생은 누가 몇 살까지 똥을 쌌다고 두고두고 우려먹으며 놀리곤 했다. 나도 그런 동생과 함께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앞서가다가 뒤를 돈 둘째가 우리 쪽으로 걸어 내려온다. 형아가 열한 살 먹고 바지에 똥을 쌌는데 둘째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혹시 놀려먹으려고 웃음기가 있지는 않은지 둘째 얼굴을 살폈다. 가까이 온 둘째가 말했다.
"형아, 괜찮아?"
나는 또 조금 감동하고 말았다. 첫째는 담담하게 "어. 괜찮아."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 느린 걸음으로 언덕을 걸어 올라가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나는 남편을 찾았다.
"여보. 첫째가 바지에 똥을 쌌어."
그러며 남편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어떤 반응일까? 웃을까, 화를 낼까, 귀찮아할까.
"뭐? 아이고……. 아까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설사했구나!"
조금도 놀려 먹을 웃음기가 없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오. 나는 또 조금 감동했다.
"아니야. 설사는 아니고. 그냥 똥이야."
"아, 그래. 괜찮아. 똥이 급하면 어른도 못 참아."
남편은 매우 진지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를 맞이하고 기꺼이 욕실에 들어가 애를 씻겼다. 나는 또 조금 감동했다.
샤워기의 물줄기 소리와 함께 그들의 다정한 대화가 들렸다.
"아빠, 아빠도 어른일 때 지하철에서 똥 싼 적 있다고 그랬잖아."
"어 맞아. 그랬었지. 그래서 아빠도 지하철로 누나 불렀잖아. 누구나 급하면 바지에 똥 쌀 수 있어. 그때 속초에서 바지에 똥 싼 건 누구였지?"
"어, 동생. 동생도 속초 수련원에서 바지에 똥 싼 적 있어."
"어 맞아. 나도 똥 싼 적 있어."
그렇게 바지에 똥을 싸 본 경험을 공유한 세 남자는 누구도 똥 싼 것을 놀리거나 우습게 생각하지 않고 첫째의 상태를 대했다. 똥이란 상황에 백 퍼센트 진지한 셋의 대화에 나만 이따금 터져 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꾹 눌렀다. 그건 똥 싼 게 웃긴 게 아니라 진지하고 진지한 그들의 대화가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나는 똥싸개 셋을 집에 두고 알림장을 사러 다른 문구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쌓인 감동이 벅차서 두근두근했다. 뜀박질로 문구점을 가도 춥지 않았고 입가엔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하늘의 예쁜 손톱달도 웃고 있는 것 같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