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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나온 Sep 30. 2024

그 옛날 터미널의 밤에

 우리는 차를 타고 터미널을 지나가고 있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운전하는 남편의 옆모습을 보다 툭 물었다. 


“혹시, 터미널과 관련된 뭐 특별한 경험 있어?”     

“그럼, 있지. 아주 특별한 경험이 있지.”     

“오~ 뭔데? 말해봐.”  

         


 

1. 그 남자의 밤



 대학교 3학년을 휴학하고 밴쿠버로 어학연수 중이었을 때거든. 


 나는 밴쿠버 다운타운(Vancouver downtown)에서 지냈는데, 가끔 다운타운에서 노스밴쿠버(North Vancouver)로 갈 일이 있었어. 거기로 가려면 가능한 이동 수단이 세 가지가 있거든. 첫째는 자차를 이용하는 것이고, 둘째는 버스, 그리고 셋째로 아주 특별한 대중교통수단이 있는데, 씨버스(Sea Bus)라고 있어. 맞아,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야.      

 나는 차가 없었으니, 노스밴쿠버를 가려면 버스나 씨버스를 타야 했어. 버스로 가려면 돌아가야 하는데, 바다로 가로질러 가면 금방인 거야. 게다가 배 요금이 비싸지를 않아. 그러니까 당연히 씨버스를 탔지. 씨버스는 유람선같이 커서 자리도 많은 데다, 바다 구경하기에도 운치 있고 좋더라고.  


 어느 날인가는 그 배를 타고 노스밴쿠버에 갔다가 글쎄 내려오는 마지막 배를 놓쳤어. 나는 돈도 없었고, 거기엔 숙박업소도 없고, 그때는 그리 추울 때가 아니어서 까짓것 첫차까지 기다리자는 마음으로 노숙을 결심했지.


 새벽 3시가 가까워지고 있었어. 첫 차는 6시인데. 나는 론즈데일 퀘이 터미널 근처 어느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지. 그런 시간에 맨정신으로 깨어 있던 적은 거의 없었어. 낮에는 따뜻했는데 새벽이 되니까 견딜 수 없이 너무 추운 거야. 밤은 칠흑같이 깜깜하고 사람은 찾아볼 수도 없었지. 그 밤에 보던 일렁이는 바다는 더 이상 낮에 보던 운치 있는 바다가 아니었어. 모든 것들이 생경하고 또 두려웠지. 시계를 보고 또 봐도 시간은 제자리였어. 


 그때였어. 어디선가 발걸음 소리가 나는 거야. 나는 겁 많은 초식동물 마냥 두 귀를 쫑긋하고 그 소리가 어디서 나는 것인가를 살폈어. 저 멀리 50m 정도 떨어진 곳에 남자 두 놈이 있었지. 둘은 속삭이듯 서로 대화하며 내 쪽으로 점점 더 가까이 걸어오고 있었어.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지. 나는 자연스럽게, 마치 이제 일어나려고 했던 것처럼 벤치에서 일어났어. 만약 내가 달려서 도망친다면 그들이 나를 향해 뛰어올 것만 같았거든. 그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어. 그때의 내 걸음걸이는 슈슈슉이야. 슈슈슉 슈슈슉 빠른 걸음으로 걸었지. 저기만 돌아서면 모퉁이다. 슈슈슉, 모퉁이를 돌아선 다음에 급하게 어디 숨을 데를 찾았어. 눈앞에 어느 집 창고 같은 데가 보이더라고. 나는 냅다 거기로 쏙 들어갔어. 터미널 벤치보다 더 깜깜한 곳이었지. 그곳에서 나는 숨도 쉬지 않고 기도했어. 지루하면서도 무지하게 무섭던 밤이었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밤이었어.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날이 좀 밝아지는 것을 느끼고 나는 비로소 그 창고에서 나왔지. 그리고 첫 차 타고 다시 왔어. 그게 다야. 끝.   



   

“오~ 재밌다! 나 이거 글로 써도 돼?”     

“엥? 왜 내 얘기를 써.”     

“내 얘기만 쓰란 법 있나. 근데 그날은 왜 노스밴쿠버에 갔어?”     

“어……. 그때……. 무슨 일이 있었어.”

“무슨 일인데? 말해봐.”

“아니 그게……. 사실은……. 그때 여자 친구랑 싸웠어.”

“아, 그래?”

“싸운 뒤에 여자 친구랑 연락이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여자 친구 집에 무작정 찾아갔지. 노스밴쿠버 어디쯤에 사는지는 알고 있었거든. 그 집을 무작정 갔는데, 그 집이 이 집인지 저 집인지 확실히 모르겠는 거야. 그래서 그 집 앞에서 계속 전화만 했어. 전화만 주야장천 하다가 막배를 놓쳤지.”     

“아하하하! 초인종이라도 누르지~ 집 문을 두드릴 용기가 없었구나.”     

“맞아. 나는 그런 용기가 없었지.”     

“그런데 그 여자 친구는 왜 전화를 안 받았대?”     

“약간 여보 같은 스타일이야. 전화기 신경 안 쓰는. 나는 일부러 안 받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별일 아니었다는 듯이, 진동으로 해 놓고 잤다 그러더라고.”   


       



2.  그 여자의 밤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도 터미널에서 잊지 못할 밤을 보낸 적이 있어.   

  

 때는 대학을 졸업한 뒤의 2월이었을 거야. 임용고시 최종 결과가 난 후였거든. 세상 쓸데없이 괴로운 공부가 임용고시 공부였다고 생각해. 고3 공부보다 더 괴로웠어. 국가 교육과정 총론과 각론을 교과별로 달달 외워야 했거든. 아이들 가르치는 사람 뽑는데 왜 잘 외우는 사람을 뽑으려고 했을까? 토시 하나라도 틀리면 감점되는 그 시험을 위해 얼마나 쓸데없는 노력을 쏟아 바쳤는지 몰라.      


 임용고시 최종 합격 결과를 받고, 드디어 그 어둡고 외로운 독서실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기쁨에 환호성을 질렀어. 이제 실컷 놀아야겠다고 다짐했지. 그날 저녁, 남자 친구와 터미널 근처 단골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어. 오랜만에 한껏 꾸미고 들떠서 나갔지.     


 그런데 있잖아, 그날 3년을 사귄 나의 남자 친구가 말없이 술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이별을 통보하는 거야. 나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어. 헤어지자는 그 말이 내 몸의 어느 장기를 움켜잡고는 떼어내 팽개쳐버리는 기분이었지.

      

 그날 나는 온 힘을 다해 매달렸어. 최선을 다해 내가 했을 잘못들에 대해 사과하고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눈물을 펑펑 쏟고. 절대로 헤어지지 못한다고 화를 내기도 하고. 몇 시간을 내내 울며 매달렸지. 그래도 그 친구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어. 

     

 너무 울어 기진맥진해진 나를 데려다주겠다며 그 친구는 끝까지 다정하더라고. 터미널 앞 택시 승강장까지 나를 데려다준 그에게 나는 마지막까지 매달렸지. 그렇지만 그는 끝까지 마음을 바꾸지 않았어. 그게 끝이었어. 끝.      


 그 친구를 그냥 보내고, 나는 터미널 안의 택시 승강장 벤치에 앉아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어. 사실 택시를 기다리는 게 아니었어. 택시 몇 대를 그냥 보내며 거기 오래 앉아 있었지. 이별을 통보받아서 아픈 게 아니었어. 그간 나의 무심함과 예민함이 그를 얼마나 외롭게 했을지 생각했지. 그때는 미안해서 아팠어. 이제 혼자라는 사실이 무서웠지. 나 역시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밤이었어.     



     

 터미널에서 우리는 유난히 길고도 깜깜하고, 집요하면서도 외롭고, 괴로우면서도 무서운 밤을 보냈네.      

 그 옛날 터미널의 밤에, 벤치에 앉아 있는 우리가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 우리는 그 밤 어떠한 종점에 다다르고,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을 했을 거야. 그래서 현재 우리가 함께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아마도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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