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들여다보는
랜선 글쓰기
두 번째 주제 - 간신히
<간신히, 간절히 >
냉장고를 훑어보다 시선의 끝에서 포도를 발견했다. 한 상자를 사서 넣어 둔 지 꽤 되었는데 아직도 별로 줄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싱싱할 때 해치우자는 생각으로 커다란 볼에 포도 두 송이를 담아 수도를 틀었다.
포도를 씻는다. 알알이 씻는다.
내리쏟아지는 물줄기에 시든 포도가 떨어진다.
휘몰아치는 물줄기를 따라 시곗바늘처럼 휑 휑 돌고 있는 포도알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포도송이를 들어 올려 물기를 털어냈다. 떨어진 포도알도 건져냈다.
간신히 매달린 포도와 결국 떨어진 포도.
유명을 달리한 포도알들을 바라보며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렸다.
시간이 포도처럼 물러 흐느적흐느적 흐르고 있었다.
할머니는 참 고운 분이셨다. 하얀 머리를 곱게 빗어 비녀로 쪽을 지고, 선이 고운 삼베옷을 즐겨 입으셨다. 평생을 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셨지만, 말과 행동에서 어느 구석 하나 거친 곳이 없는 풀꽃 같은 분이셨다.
어떤 한자를 쓰시는지도 모르면서 할머니의 이름을 참 좋아했다. 이분님. ‘이분’이라는 단어가 누군가를 높여 이르는 말인데 거기에 누구를 높이는 접미사인 ‘님’이 또 붙어 있다. 할머니의 이름은 높고도 높은 이름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라 부르기보다 이분님씨라고 부르는 걸 좋아했다.
어느 추석 명절에 친척들이 다 모여 식사하고 있었다. 남자들끼리 한 상에 모여 있고, 여자들은 좀 더 작고 낮은 상에 모여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누군가가 후식으로 포도를 내왔다. 포도를 먹는 와중 옆에 앉은 이분님씨가 주름 가득한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종종 하던 말씀을 또 우리 엄마에게 한다.
“야는 때리지 말고 키워야 혀.”
“아이고, 얘는 맞을 짓 안 하고 잘해요.”
“그치? 그래도 절~대 때리지 말고 키워. 귀한 아이여.”
내가 겨우 걸음마를 할 수 있었던 때의 어느 여름날. 아빠는 출근하고, 엄마는 소를 키우느라 축사에서 바쁘셨다. 나를 돌봐주시는 건 할머니였다. 이분님씨는 나를 등에 업고 아궁이가 있던 부엌에서 집안일을 하셨다. 그러다 잠시 무거운 손녀딸을 내려놓고는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장난감 배 하나를 띄워 주셨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세숫대야에 물만 받아 주어도 혼자 참방대며 한참을 잘 노는 아이였다.
할머니는 집안일을 하시다 손녀가 잘 놀고 있는지 종종 뒤를 돌아보셨다. 손녀딸은 웃옷을 다 적셔가며 신나게 물장난을 했다. 그러다가 장난감 배에 물을 담아서는 입으로 가져가 꼴깍꼴깍 마시기도 하더란다. “에비, 지지다!”라고 말하면서도 귀엽다는 눈으로 씩 웃었을 이분님씨. 얼마가 지났을까. 이분님씨는 한참 집안일을 하다 이상한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홱 돌아보았다.
아뿔싸, 손녀가 쓰러져 있었다.
이분님씨는 급하게 달려와 쓰러진 손녀를 확인했다. 손녀는 눈이 돌아간 채 입에 거품을 물고 몸을 떨고 있었다. 놀라고 당황한 이분님씨는 손녀를 일으켜 흔들었다. 그러다 장난감 배와 함께 세숫대야에서 둥둥 떠 있는 플라스틱 병 하나를 발견했다. 탐스러운 포도와 사과 따위가 그려져 있는 농약병이었다. 나는 농약을 물에 섞어 장난감 배로 떠 마신 것이었다.
읍내도 아닌 구석진 시골 마을에 병원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차도 없었다. 정신을 잃은 나는 동네 아저씨 오토바이의 도움을 받아 읍내 병원으로 옮겨졌다. 읍내 병원에서는 더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시 구급차를 타고 옮겨졌다. 도착한 큰 병원에서는 아이가 너무 어리고, 너무 늦게 왔다고 했다. 가망이 없다고 했단다. 의사는 수술이 의미가 없다며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와 부모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억척같이 매달려 제발 살려달라고 빌었다. 지나가는 아무 의사나 간호사를 잡고 제발 우리 아이를 살려달라고, 뭐라도 해 달라며 울고 호소했다. 그러자 어느 의사가(할머니 말로는 의사 같지도 않던 새파랗게 젊은이가) 자기가 해 보겠다며 수술방을 잡았다고 한다.
“간신히 살렸지. 아주 간신히 살아났어.”
나는 살아있다. 농약을 먹은 뒤 살아난 나를 두고 누군가는 참 운이 없다고 했고, 누군가는 정말 운이 좋다고 했다. 할머니와 부모님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각자의 신에게 얼마나 빌었을까. 내가 지금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염려와 간절함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센 물줄기를 맞고서도 가지에 억척같이 매달려 있는 포도알들을 본다. 그들은 마치 부둥켜안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포도 하나를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간절히 매달려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