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의 심연 끝에서 마주한 것은 적이 아니었다. 텅 빈 나 자신이었을 뿐. 채우려 발버둥 칠수록, 어둠은 더욱 깊어질 뿐이니. 진정한 강함이란 비워내는 용기에서 태어나는 법이다."
스승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낮고 고요했다. 산길을 따라 걷는 우리의 발소리만이 적막을 깼다.
나는 동자승, 어린 나이에 스승을 따라 산사의 문을 넘은 소년이었다. 세상은 전쟁의 포화로 뒤덮였고, 화염과 비명 속에서 우리는 달아나고 있었다. 스승의 낡은 가사는 바람에 펄럭였고, 그의 눈은 여전히 고요했다. 마치 세상의 혼란이 그를 비껴가는 듯했다.
"스승님,"
나는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왜 우리는 도망칩니까? 강한 자라면 싸워야 하지 않습니까?"
스승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미소 지었다.
"강함이란 무엇이냐, 소년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 머릿속엔 칼을 든 병사들, 무너진 마을, 그리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강함이란 그런 것들이 아니었던가? 힘으로 적을 쓰러뜨리고,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
스승은 나무 아래 멈춰 서서, 멀리 연기가 피어오르는 골짜기를 바라보았다.
"너는 공허를 두려워하느냐?"
"공허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엇입니까?"
"네 안의 텅 빈 공간이다. 두려움, 분노, 욕망… 그것들이 너를 채우려 들지만, 실은 너를 더 비우는 것들이다."
스승은 손에 든 지팡이로 땅을 툭 쳤다.
"심연을 마주할 때, 네가 본 것은 무엇이었느냐?"
나는 멈칫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늘 뭔가를 잃고 있었다. 가족, 집,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조차 잊혀져 갔다. 스승의 말이 내 가슴을 찔렀다. 내가 마주한 것은 적이 아니라, 텅 빈 나 자신이었다.
"스승님,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목소리는 떨렸다.
"비워라."
스승은 단호히 말했다.
"두려움을 붙잡으려 하지 말고, 놓아라. 욕망을 쫓으려 하지 말고, 버려라. 네 안의 공허를 받아들여라. 그때 비로소 진정한 강함이 태어난다."
우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전쟁의 불길은 멀리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졌다. 스승의 말은 칼보다 예리했고, 방패보다 단단했다. 나는 동자승, 아직 어린 소년이지만, 그날 스승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공허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 그리고 비워내는 용기를 배웠다.
"운명은 모든 것을 빼앗고, 텅 빈 어둠만을 남겼다. 그러나 마지막 남은 불꽃 하나는 빼앗지 못했으니, 그것은 바로 선택할 자유다. 모든 것을 잃은 자만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스승의 말이 다시 내 가슴을 울렸다. 우리는 이제 산을 넘어 깊은 숲으로 들어섰다. 어둠이 짙게 깔린 숲 속, 멀리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스승의 가사 자락을 꼭 쥐며 걸음을 재촉했다.
"스승님, 운명이 모든 것을 빼앗았다면, 우리가 가진 선택의 자유란 무엇입니까?"
나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두려움이 목을 조였지만, 스승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단단해졌다.
스승은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며 은은한 빛을 뿌렸다.
"선택이란, 소년아, 네가 무엇을 잃었든, 무엇을 마주하든, 그 안에서 너의 길을 정하는 것이다. 운명은 네 발을 묶을 수 있어도, 네 마음을 꺾을 순 없다."
그 순간, 멀리서 횃불의 빛이 숲 사이로 어른거렸다. 추격자였다. 내 심장은 쿵쾅거렸지만, 스승은 여전히 침착했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소년아. 도망칠 것인가, 맞설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찾을 것인가?"
나는 손에 쥔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꽉 쥐었다. 스승의 말처럼, 내 안엔 아직 꺼지지 않은 불꽃이 있었다. 그 불꽃은 두려움 속에서도 타오르고 있었다.
"스승님, 저는… 다른 길을 찾겠습니다."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좋다. 그럼 가자, 운명이 허락하지 않은 길을."
우리는 횃불의 빛을 피해 숲 깊숙이 들어갔다. 어둠은 우리를 삼킬 듯했지만, 내 안의 불꽃은 점점 더 밝게 타올랐다.
텅 빈 칼집은 패배가 아니다. 새로운 칼날을 기다리는 운명의 그릇이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영혼이 던지는 유일한 질문. 그 답을 찾는 자만이, 시간의 주인이 될 자격을 얻는다.
스승의 음성은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우리는 숲속 깊은 동굴에 몸을 숨긴 채, 추격자들의 횃불이 멀어지길 기다렸다. 동굴 안은 축축하고 차가웠지만, 스승의 말은 내 안에서 뜨거운 불씨를 지폈다.
"텅 빈 칼집은 패배가 아니다. 새로운 칼날을 기다리는 운명의 그릇이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영혼이 던지는 유일한 질문. 그 답을 찾는 자만이, 시간의 주인이 될 자격을 얻는다."
나는 손에 쥔 나뭇가지를 내려다보았다. 칼집도, 칼날도 없는 내 손은 텅 비어 있었다.
"스승님, 제 칼집은 비었습니다. 무엇으로 채워야 합니까?" 내 목소리는 동굴 벽에 부딪혀 작게 울렸다.
스승은 바위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칼날은 네가 이미 가지고 있다, 소년아. 두려움, 슬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선 너의 의지. 그것이 네 칼날이다." 그는 손을 뻗어 내 가슴을 가리켰다. "네 영혼이 묻는 질문에 답하라.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
동굴 밖에서 바람이 휘몰아쳤다. 추격자들의 소리가 멀어진 듯했지만,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생각했다. 가족을 잃고, 집을 잃고, 모든 것을 잃은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그 순간, 스승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비워내는 용기, 선택의 자유, 그리고 이제 내 칼집을 채울 칼날.
"스승님, 저는… 희망으로 채우겠습니다."
나는 단호히 말했다.
"전쟁이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제가 다시 세울 세상을 꿈꾸겠습니다."
스승의 눈에 드디어 빛이 스쳤다.
"좋다, 소년아. 그 희망이 너의 칼날이다. 이제 가자, 시간의 주인이 될 길을 찾아."
우리는 동굴을 나서며 새벽의 첫 빛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 칼집은 비어 있었지만, 이제 그 안엔 희망이라는 칼날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재가 된 절망의 대지 위에, 마지막 씨앗 하나가 남아 있었다. 희망은 가장 작은 불꽃에서 시작되는 법. 그 불꽃을 지키는 자만이, 새로운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벽의 첫 빛이 숲을 뚫고 들어왔다. 우리는 동굴을 벗어나 불탄 마을의 흔적 위에 섰다. 잿더미 사이로 스승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모든 것이 재가 된 절망의 대지 위에, 마지막 씨앗 하나가 남아 있었다. 희망은 가장 작은 불꽃에서 시작되는 법. 그 불꽃을 지키는 자만이, 새로운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나는 발밑의 잿더미를 내려다보았다. 폐허 속에서, 정말로 작은 씨앗 하나가 눈에 띄었다. 연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그 안엔 생명의 가능성이 깃들어 있었다.
"스승님, 이 씨앗이… 제 희망입니까?"
나는 조심스레 그것을 집어 들며 물었다.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씨앗은 네가 지켜야 할 불꽃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태웠지만, 그 불꽃만은 꺼지지 않았다. 이제 너는 그걸 심고 키울 책임이 있다."
멀리서 다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추격자들이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씨앗을 품에 꼭 쥐었다.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내 안의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스승님, 어떻게 이 불꽃을 지킬 수 있습니까? 저는 아직 약합니다."
"약함은 핑계가 아니다."
스승은 단호히 말했다.
"불꽃을 지키는 힘은 네 선택에서 나온다. 두려움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그 씨앗을 위해 싸울 것인가?"
그는 손을 뻗어 내 어깨를 다독였다.
"가자, 소년아. 이 재의 대지 위에 새 생명을 심을 곳을 찾아."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씨앗은 내 손 안에서 따뜻하게 느껴졌다. 추격자의 그림자가 가까워질수록, 나는 더 단단히 결심했다. 이 작은 불꽃, 이 희망을 지키기 위해, 나는 새로운 시간의 주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