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있어서는 P라고 주장하는 나. 숙소는 예약해 둘지언정(성수기니까) 이동편은 예매해두지 않는다. 그저 목적지로 가는 다양한 루트만 미리 알아볼 뿐. 전날 저녁, 무대 위 가수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기차앱을 열었다. 오전 시간대 기차편이 모두 매진이었다. 숙소에서 10-11시 전후로 체크아웃하고 가려고 했는데... 뭐, 부지런하지 않은 내 탓이지, 당일에만 이라도 잘 도착하면 되지. 그러다 정신이 번쩍, 내가 내릴 역을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가려면 서울역에 먼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나이기에 이란 지역을 가니까 이란역으로만 무작정 찾아봤던 것. 왜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구글 지도를 열어 도착지를 이란역이 아닌 숙소로 검색하니 기차역으로 한 정거장 더 가야 하는 자오시역에 숙소를 잡아둔 거였다. 진짜, 아휴. 재밌네, 나. 나니까 참지.
12/20목요일-12/23월요일 ; 12/23 월요일은 화롄에서 이란 지오시로 이동하는 날!
전날 편의점에서 산 파파야 우유와 알로에 요구르트를 아침으로 마셨다. 파파야 우유는 기대보다 별로였고, 알로에 요구르트는 한국에 가져가고 싶을 정도로 맛있었다. 남은 에그롤 과자를 해치웠고, 땅콩 과자도 한 개 먹은 것 같다. 에그롤은 부서지니까 빨리 해결해야 했다. 땅콩 과자는 마지막 여행지까지 함께 했다. 아껴 먹은 것이 아니라 따로 생각나지 않아서 크로스백에 넣고 다녔고 멍할 때 하나씩 꺼내 먹은 것이다.
12/23월요일-12/25수요일, 자오시 ; 12/23 월요일
이란, 아니 자오시역에 오후 3시 30분 전후로 도착했다. 도착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릴랄말락. 역사 앞에서 구글맵을 켜고 숙소를 도착지로 설정했더니, 도보로 5분 거리. 하지만 제대로 왔나 싶을 정도로 부담스럽게 가까운 2분 거리다. 보부상 스타일이라 캐리어에, 백팩, 앞백(백팩 둘), 크로스백까지 해서 짐이 많았는데도 바로 도착했다. 건물 앞에서 아고다를 켜서, 이게 맞나 싶어 건물의 외관을 확인하니 맞긴 하다.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좋긴 정말 좋았다. 세상 가깝네. 체크인이 4시여서 숙소 라운지에서 쉬다가 방을 배정받아 짐을 올려두었다. 크로스백, 에코백을 잘 챙기고 길을 나선다. 나오는 길에 부엌이며 복도며 계단이며 숙소를 살펴보니 굉장히 깔끔하다. 4인 여성 도미토리룸, 안쪽의 아랫칸 침대. 좋은 선택이다.
우선 첫날이고 비도 오니 지도는 끄고 걸어본다. 숙소를 기준으로 좌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로 역,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오르막길이 길게 뻗어져 있다. 우산을 들고 슬렁슬렁 걷는다. 맞아도 되는 수준의 비였지만, 여행자는 빨래하기가 힘드니까 우산을 꼭 쓴다. 그러다, ... 사랑해 정말 이 동네. 뭐야, 정말!
숙소에서 채 5분이나 걸었을까? 작은 공원이 있었고 사람들이 꽤 있어 들어가 봤다. 공원의 초입인데, 정자 형태를 띤 족욕탕이 4-5개 있었다. 온도도 다 달랐고 모든 칸이 운영되고 있었다. 정말 너무 좋다, 나 숙소 정말 잘 잡은 거 같아! 진짜 심장 뛴다, 심장 막 뛰어!!
이란현이 온천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화롄 다음의 목적지로 이란을 선택했다. '탕웨이거루 온천공원'과 '자오시 온천공원'을 즐기려고 했던 선택이었다. 숙소에서 도보로 20분 이상 가야 하는 곳이지만, 혼자여행자에게 20분 거리는 어려운 선택은 아니다. 그런데, 럭키스럽게도, 심.지.어. 잘못 알고 숙소를 잡은 자오시 마을 그 자체가 온천마을이었다. 보부상은 이럴 때 좋아. 물 닦을 손수건도 있겠다, 바로 신발과 양말을 벗어던지고 하나의 탕을 선택해 들어가 본다. 부슬비에 차가워진 얼굴과 뜨끈한 하체의 조화. 노곤노곤 너무 좋잖아!
비는 오지만 전체적으로 날이 따뜻한지라 모기가 많았다. 아주 작은 모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날아다니고 있었다. 족욕탕에 앉아서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여기 모기방향제가 엄청 유명하더라. 초파리 수준의 사이즈였고 나만 물지 말기를 기원했다. 하... 모기건 똥파리건 그래도 너무 좋다. 슬슬 배가 고프니 요깃거리를 찾아 물기를 닦고 길을 나선다.
宜蘭 Yilan County 礁溪 Jiaoxi ; 맛도리, 이란현 자오시 마을
넓지 않은 2차선 도로에 바짝 관광버스가 붙어있다. 매장 내부에도, 매장 창문 바깥에도 다닥다닥 사람이 정말 많은 곳이었다. 뭘 파는 곳일까 들어가서 구경을 해본다. 베이커리를 파는 곳이다. 음료는 없이 빵만 판매하고, 앉아서 먹고 갈 수 있는 테이블은 따로 없다. 매장 안쪽의 키친에서 빵이 끊임없이 나와 채워지고 있었고, 다양한 종류의 베이커리가 여기도 저기도 펼쳐있었다. 직전의 화롄에서 방문한 TOP 베이커리와는 다른 결의 베이커리인 건 확실해보였다. 손님들의 트레이에는 빵이 산처럼 쌓여있다. 한 가지 빵을 대여섯 개씩 사는 사람들이 꽤 많았고, 양손 스킬을 이용하여 트레이 두 개를 불안하게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가는 손님들은 양손에 빵빵한 봉투를 들고 미소를 지으며 나갔다. 여기를 모르고 왔더라도, 이 광경에 구경해 볼 법했다. 계산하는 라인도 6줄이고, 그 줄도 모두 엄청 길다.
자오시는 온천 말고도 품질 좋은 파로도 유명한 지역이다. 삼성총(三星葱)이라는 단맛이 강하고 파 특유의 향미가 깊은 품종이 재배되는 곳이다. 그러니까 사과로 따지면 부사, 아오리, 홍옥같이 파도 다양한 품종이 있는데 그것 중 하나가 삼성총인 것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맑은 물이 흐르며 배수가 잘 되는 비옥한 화산토는 대파를 재배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란현의 이 자연환경이 대파를 재배하기에 아주 적합하고, 삼성총이라는 품종은 프리미엄급 농산물로 인지되고 있단다. (...오랜만에 재배지역에 관한 글을 보니, 커피와 비슷하게 느껴지는구먼. 허허.)
奕順軒 礁溪店, 이슌쉬엔. 각종 블로그엔 우리나라의 성심당과 같은 존재로 소개된다. 지역적 특색을 살리다 보니 파를 이용한 각종 빵들이 많이 보였다. 이슌쉬엔에 들어오기 전, 거리에 있던 호텔 라운지에서 베이커리를 팔기에 들어가 봤는데 그곳에서도 파빵이 많이 보였다. 번역기를 돌려보며 빵이름과 빵에 들어간 재료들을 보았다. 이슌쉬엔은 성심당처럼 이란에만 매장이 있다고 한다. 그래, 이렇게 해야 자국 관광객들도 찾아오지. 여러 지역에 점포를 늘리면 희소성도 없고, 그만큼 먹고 싶지도 않은 심리. 내 기준으로 비교하자면 노티드 도넛의 이러한 행보가 노티드의 인기를 금방 식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무튼, 빵력 레벨이 높은 나는 맛도리 있을 법한 빵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모든 빵이 크기 대비 굉장히 저렴했고 아, 정말 몇 개 빼고는 모두 먹어보고 싶었지만 빵이 정말 컸다. 작은 빵 여러 개를 사서 맛보고 싶은 내 욕심을 채우기엔 턱없이 컸다. 구경만 하다가 빈손으로 매장을 나섰다. 돌돌이파도넛튀김을 먹으러 가기 위해.
돌돌이파도넛튀김은 빵의 모양을 보자마자 생각난 그냥 내 별칭이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밀가루 전병을 얇게 펴고 그 위에 대파를 자르지 않고 그대로 척 올려 김밥처럼 말은 뒤에, 똬리를 틀고 나서 자박자박한 기름에 전 부치듯 그대로 튀긴 것이다.
얼마나 맛있던지. 파향이 정말 기가 막혔다. 그리고 파가 딸려 나오지 않게 앞니로 잘근잘근 씹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주문하자마자 바로 튀겨준다. 손으로 잡았을 때 따끈따끈해서 입으로 바로 넣었는데 입술이 벗겨지는 줄 알았다. 매장 내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그대로도 먹어보고, 소스 존에 가서 이것저것 조금씩 뿌려 먹어보기도 하고. 내일 또 와야지 하고 맛있게 먹고 길을 나섰다. 아까와는 다른 길들로 내려가본다. 좌로 꺾고 우로 꺾고 하다보면 어차피 숙소엔 도착할 테니. 동네 슈퍼에 들어가서 구경도 하고, 대만에서 선물로 많이 사간다는 누가크래커도 1개입 구매해 먹어봤다. 여기도 삼성총, 파가 들어있었다. 짭조름하고 달짝지근했다.
노점인 듯 가게인듯한 도로 위 매장들이 여럿 있다. 그중, 한 군데서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다. 돌돌이파도넛튀김과 같은 형태의 것인데, 여기는 파를 다졌다. 고기가 들어간 것, 들어가지 않은 것 선택할 수 있었다. 돌돌이파도넛튀김의 맛이 아직 입에 남아있는지라, 하지만 더 먹고 싶었던 찰나 발견했기에,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길거리파도넛튀김을 하나 구매했다. 세상에, 미쳤나봐, 더 맛있어! 더 짭조름하고, 미친 듯이 더 뜨겁고, 더욱 기름지고, 파향은 더 많이 나고 -파를 다져서 당연한 거겠지만-. 입술이 반질반질해질 정도로 기름이 많았지만 와, 정말 지금도 입에 코에 그 향과 맛이 떠오른다. '내일 돌돌이까지 올라가지 말고 여기에 다시 와야지' 다짐했다.
배가 고프지 않은데 배가 고픈 것, 아시는지? 맛있는 것들을 감질나게 먹었더니 입에서 무엇을 더 넣어달라 소리치는 그 느낌. 그 아우성을 무시할 수 없어 이슌쉬엔에 들렀다. 러시아빵이라고 번역되는 빵 하나를 들고, 다른 손님들의 트레이를 구경하며 줄을 서본다. 아, 겉봉투 필요 없어요, 저 에코백 있거든요.
파를 파로 덮을까 하다가, 길거리파도넛튀김의 향을 지우고 싶지 않아 담백해 보이는 빵을 선택했다. 왜 러시아빵으로 번역될까. 아무리 찾아봐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 빵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구매했고, 먹을 때도 일말의 기대 없이 먹었던 걸로 기억된다. 빵을 사서 나오자마자 입 안의 아우성은 사라졌고, 이 녀석은 저녁이나 되어 내 입에 들어왔다. 내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참, 내 손은 크다. 그러니 얜 작은 빵이 아니다.
숙소로 돌아갔다. 비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아서 더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이 지역의 목적지였던 두 온천공원에는 가지 않았지만, 동네 공원에서 족욕을 했으므로 그걸로 충분하다 여겼다. 우선 씻고 뭐라도 하자의 생각으로 숙소에 올랐는데, 끼얏호. 루프탑에 공용탕이 있었다. 수영복 착용이 필수, 17시-19시는 여성만, 19시-21시는 남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시간대. 게을러터짐의 P에게 이번 여행은 정말 좋은 게을러터짐이었다 생각한다. 생리도 끝났겠다, 수영복을 챙겨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공용탕은 온천물이 콸콸 나왔다. 지붕은 있지만 벽면이 뚫린 상태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시간을 즐겼다. 노천탕에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없었고, 혼자서 음악도 듣고 유튜브도 보면서 힐링 타임을 가졌다.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도 온천물이라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몸을 푹 담그고 나오니 배가 좀 고팠다. 편의점에서 직원에게 요청해 컵라면을 하나 추천받았다. 그리고 계속 도전해보고 싶던 검정 물에 담겨있던 달걀과, 느끼한 속을 잡아줄 블랙티 NT$10도 구매했다. 맵찔이에게는 조금 매콤했지만, 독특한 풍미의 라면이었다. 아, 참. 라면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냉장고 쪽에 있는 면들로 나를 안내했다.
아니 아니, 나 여기 컵라면 섹션에서 추천해 줘.
아니, 그건 라면이 아니야. 인스턴트 누들이라고 해야 해.
팩차는 생각보다 더 달콤해 스윗블랙티라고 부르기로 했다(내가). 삶은 달걀은 흰자는 간장물에 물들었지만 짜지 않았고 그냥 보통의 것들과 같이 담백했다. 러시안빵이 요물이다. 치즈케이크빵같이 치즈의 풍미가 아주 잘 느껴졌고 체다-모차렐라 치즈의 다양한 향이 있었다. 카스텔라 같으면서도 그렇다고 퐁실퐁실하진 않고, 비싼 솜이불 같이 빵 속이 꽉 차있는데 씹으면 또 가볍고 부드럽다. 겉은 약간 쿠키같이 바삭하게 구워져 있었는데 바닥 부분은 짭쪼롭한데 또 윗부분은 달았다. 이 가격에 이 맛과 이 사이즈를 만들어내는 것이 대단했다. 한국은 마우스만 한 소금빵이 4,000원이나 하는데...
족욕에 루프탑 노천탕에, 파도넛튀김과 러시안빵까지.
한창 작은 것에 행복해할 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