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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여기가 찐 야시장이지.

by 배홍정화



12/20금요일-12/23월요일, 화롄 ; 12/22 일요일

오늘도 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한다. 날도 좋고 컨디션도 좋았지만, 관광에 대한 욕심이 없기도 하고, -원했던 관광은 사라지고, 득템 관광을 했으니 만족한 상태였고- 몸을 혹사시키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늘도 핫팟을 먹으러 갔다. 어제의 기억이 좋았기 때문에 어제의 그 가게로 향했다. 동네에서 유명한 맛집에 줄을 길게 서고 싶진 않았다. 내가 제대로 먹는 건 하루 한 끼. 그러기에, 여긴 내 입에 보장된 맛집이니 재방문에 있어 선택이 쉬웠고,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므로.


하지만...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은 이 날의 따뜻했던 식사는 나를 좀 슬프게 했다. 어제와 다르게 김치핫팟을 선택했다. 슬슬 김치가 떠올랐기도 했고 + 어제와 다른 톤의 것을 먹어보고 싶었고 + 나는 맵찔이니까 스파이스 표시된 건 쳐다보지도 않았다. 헤헤, 내가 생각한 김치 핫팟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끓기 전부터 물은 굉장히 맑았고, 그냥 김치 몇 조각이 턱 올려져 있었다. 김치찌개같이 얼큰짭쪼름한 걸 생각한 내 잘못. 굉장히 심심한 김칫국이었다. 김치 몇 조각에 냄비 가득 물. 심지어 사리 면도 잘못 선택해서 쫄병스낵을 삶아 먹는 기분이었다.


KakaoTalk_20250215_171855586.jpg I-MEI 브랜드가 유명하다기에.


밥을 먹고 동네 슈퍼에 들어갔다. 나의 이 슬픈 혀를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인스타그램에서 알고리즘으로 뜬 '대만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추천하는 과자' 게시물을 봤고, 거기서 본 과자 두 개를 집었다. 에그롤은 비렸고, 땅콩 쿠키는 세상 딱딱했다. 그래도 땅콩 쿠키는 먹자마자 맛있다-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생각나는 맛이었다.


타이베이에서 화롄으로 올 때 기차를 타고 넘어왔고, 내일 여기 화롄에서 이란으로 넘어갈 때도 기차를 탄다. 같은 기차역이다. 하지만, 한 번 동선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흠... 이래도 내가 J가 아닌 게 맞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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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는 날 구경하지 못한 역사를 구경했다.


역사에서 나와 오른쪽 방향으로 걸었다. 어디 멀리 가고 싶진 않고, 조금 돌아다니다 들어가고 싶었다. 큰 공원이 보였다. 그리고 앞 쪽에서 음악소리가 들렸다. 비눗방울을 부는 아이들, 뛰어노는 아이들, 놀이터를 지나 잔디밭이 나오고, 큰 무대가 보였다. 그리고 천막으로 세워진 여러 부스가 있었다.


ㅡ오, 동영상 올릴 수 있다는 걸 지금 알았다!! 이걸 몰라서, 그동안 찍은 걸 하나도 못 올렸네!!


어렸을 때 동네 아파트 단지에서 열린 야시장이 생각났다. 쉼터 정자를 기준으로 아파트 길목에 여러 상인들이 왔었다. 지금 시대라면 푸드 트럭이 오겠지만, 그때는 푸드 트럭의 개념도 없었고(199X년), 테이블을 펼치거나 돗자리를 깔아 그 위에서 뭘 팔거나 했던 것 같다. 이 야시장은 마치 그 상위 버전 같았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큰 야시장은 아니었고, 주변을 살펴보니 약 3주간 토-일에 공연도 하고, 영화 상영도 하고, 강연도 하는 그런 행사였다. 럭키-걸! 이런 걸 마주하다니!! 이때 난, 김치 핫팟과 에그롤의 슬픔은 바로 잊었던 것 같다. 단순하면, 이런 게 참 좋아.


사회자의 소개로 2인조 밴드가 무대에 올랐을 때 야시장 가운데 도착했다. 몇 소절 듣고 나도 따라 할 정도로 노래가 쉬웠다. 전국노래자랑처럼 의자를 깔아 두고, 그리고 앞에서 뒤에서 춤추고 소리 지르며 열광하는 관객들이 많았다. 남녀노소 다 따라 부르니 굉장히 흥겨운 '사랑을 했다♬' 급인가 보다 생각했다. 이 공연이 끝나고, 다음 가수가 또 나왔고, 그리고 '인사이드 아웃 2'를 틀어줬다.

노래 들으니까 또 흥겹네.
정말 대단한 가수님. 스타성이 아주 대단했다.


이 가수의 공연이 끝나고 야시장을, 천막을 다 돌아봤다. 그리고 한 가게 앞에 우뚝 멈췄다. 돼지고기!! 바삭바삭한 바비큐! 단백질이다!!! 사진으로 된 메뉴판이 있었지만, 메뉴판에 없는 방식으로도 주문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옆에 소녀들이 정말 맛있게 먹고 있었다. 그래, 오늘 나의 저녁은 이걸로 하자. 배가 안 고팠는데, 꼭 먹어야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주문할 때 번역기를 보여줬는데 소통의 오류가 있었나 보다. 분명 앞에선 내 것을 썰고 있는데 뒤에서 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아잇, 저기!!

저는 빵은 필요 없고, 고기만 적은 양으로 주세요!!


외쳤다, 흡사 울부짖음 ㅋㅋㅋ 끝나지 않은 시련. 고기박스를 봉투에 담아주면서 NT10$짜리 사이드(곁들임 반찬) 두 개를 담는 것이다. 어랏, 나 필요 없는데.


나 고기만 먹을 건데!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선물. 우물쭈물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히 주문하고자 하는 어설픈 외국인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고마워라, 미안해라.


KakaoTalk_20250215_171855586_04.jpg 썰 때의 바삭했던 소리를 잊지 못해.


고기 봉투를 들고, 스크린에 상영되고 있는 인사이드 아웃 2를 봤다. 더빙버전이라서 내 귀엔 들리는 것이 없는지라 금세 재미가 없어졌다. 뒤를 돌았는데 La Marzocco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라테를 주문했다. 나 라테 안 좋아하는데 말이지...


아, 저 리드는 필요 없어요, 찡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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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했지만 부드러웠던 라떼. 4/5나 마셨다. 다 마신거지 뭐.


고기를 서서 먹기엔 짐이 너무 많았다. 백팩에 크로스백에 에코백까지. 바닥에 앉아 먹기엔 괜히 쯔쯔가무시가 걱정되었다. 천막들 옆 비어있는 테이블에서 편하게 먹고 싶기도 했지만, 소심한 나는 이건 좀 어려웠다. 무대 앞 의자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숙소에 들어가서 편하게 먹어야겠다 하고 공원 옆을 크게 한 바퀴를 돌았는데, 오- 니쥬데쓰네! 아, 니쥬=팔레트.


KakaoTalk_20250215_171855586_10.jpg 물건을 올려놓고 파는 이도 있고, 앉아서 쉬는 이도 있는 니쥬. 아, 팔레트. 아니 뭐, 낮은 평상 정도?!


불편하겠지만 이것 또한 추억이지. 이런 야시장을 만났는데, 이런 것도 같이 해봐야 이 공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생각이 들어 털썩 앉아 주섬주섬 고기를 꺼냈다. 세상 낮은 테이블이라 불편한 건 맞았지만, 현지를 즐기고 있는 내가 괜스레 멋졌다. 여유 있는 척 시작했지만, 정말 여유로웠다. 그리고, 외국인에게 베풀어준 백김치와 유자맛이 나는 사이드 메뉴는 정말 환상이었다.


KakaoTalk_20250215_171855586_12.jpg 동네를 즐기는 방법, 동네사람이 즐기는 것처럼 행동해 볼 것.




어린 시절도 생각나고,

여유도 즐길 수 있는 소중했던 시간과 공간.

누구도 쉽게 누리지 못할,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던 찐-야시장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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