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금요일-12/23월요일, 화롄 ; 12/21 토요일
오후 한시쯤 되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엄청난 천둥소리를 들었기에. 비가 오는 날에 돌아다니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느지막이 일어나 오늘은 밥만 먹고 숙소에 머물러야겠다 생각했다. 날씨가 어느 정도로 안 좋을까 체크할 겸 커튼을 걷었는데, 세상 맑다. 심지어 바닥이 젖어있지도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는 공항 근처이기도 하다. 기차역, 버스터미널, 공항이 한 군데 밀집해 있는 교통의 요지였던 것. 화롄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날 하늘에선 제트기도 봤다. 흠, 어쩌면 이 숙소가 누군가에겐 최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에겐 최고였다. 밤늦게, 이른 아침엔 소음이 없기 때문에 불편이 없었다. 심지어 아침을 여는 알람이라고 생각하면 더 좋은 거니까!
몸이 조금 추웠다. 어제 바닷바람을 많이 맞아서였던 걸까. 따끈한 국물이 필요했다. 구글 지도로 핫팟을 검색하고 길을 나섰다. 핫팟은 '1인용 훠궈'라고 생각하면 된다. 입장하니 키오스크가 보였다. 하지만 한자로 가득한 키오스크는 나에게 무용지물이었다. 우선 안내된 자리로 가니, 내가 외국인인걸 눈치챈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다주며 영어로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 함께 키오스크로 가서 주문을 도와주었다. 핫팟의 국물 베이스를 선택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나는 'milk hotpot, 우유 핫팟'을 선택했다. 한국에서 먹어보지 못한 것이고, 따뜻한 우유겠거니, 어쩌면 수프 같지 않을까 해서 선택했다.
핫팟이 준비되기 전에, 셀프바를 둘러봤다. 밥, 샐러드, 음료, 아이스크림, 각종 소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굉장히 단출했지만 딱 필요한 것들만 있어서 오히려 난 좋았다. 깔끔하다는 인상이 들었으니. 샐러드바에 삶은 얇은 면이 하나 있었는데, 굉장히 독특하고 맛있었다. 이게 생각나서 다음날 한 번 더 이곳에 올 정도였으니. 그리고 핫팟에 넣어먹을 면까지 하나 챙겼다. 사리로 준비된 면은 총 3가지의 면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가장 무난해 보이는 면을 택했고,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처음에 받은 우유 핫팟을 보고선 이게 뭔가 싶었다. 국물(우유)에 뭔 덩이가 이리 많은가 생각하면서, 아 지방인가 보다 하고 또 개념치 않고 넘겼다.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마다 흰 거품이 용암처럼 튕겨져 나왔다.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냄새가 진짜 고소했다. 물티슈를 꺼내 옷에 튄 하얀 국물들을 닦으면서 기다렸다. 핫팟이 끓어 덩어리 진 지방 혹은 기름들이 보이지 않고, 고기와 채소들이 익고, 두부피가 익고 나서야 국물을 한 스푼 떠 맛보았다. 엄청 고소하다, 그리고 전혀 느끼하지 않았다. 몸이 나른해진다. 오늘 시작이 좋은 걸? 저 검은 무언가 빼고는 국물까지 싹 비웠다. 검은 저것은 나의 추측으론 오리 간. 쟨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다. 맛있게 먹은 내 입을 더럽힐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려 걷다 보니 '문화창의산업단지'가 보인다. 대만 지역 곳곳을 돌아다닐 때마다 보인 문화지구. 옛터를 살려 내부를 정리하고 팝업을 하거나 마켓을 연다. 아무래도 이전 직장이 이런 콘셉트의 곳이었다 보니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어떻게 해야 터를 간직하면서 새로운 트렌드로 이끌어나갈지, 여기서는 어떤 식으로 지역마다 어떤 차별점을 두어 운영하고 있는지 비교해 볼 수 있는 시간들이었다.
문화지구를 한 시간 정도 둘러본 뒤, 옆 문으로 나왔다. 동네 빵집스러운 TOP 베이커리가 있다. 간단히 구경하러 들어갔는데 와,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한국에서는 크루아상, 베이글, 치아바타, 타르트, 소금빵 등 어느 가게에나 있는 것이 비슷비슷해서 베이커리 샵 가는 게 이젠 즐겁지 않았다. 특색이 딱히 느껴지지 않기에 굳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여기는 진짜 한국 옛날 동네 빵집 같은 것들이 쫙 깔려있었다. 겉에서보다 내부 규모도 커서 종류도 다양했다. 부드러운 시폰, 롤케이크, 이름을 알 수 없는 다양한 베이커리들, 케이크도 옛날 스타일이다. 그리고 머랭과 푸딩까지. 다 쓸어 담고 싶었지만, 번역기를 검색하면서 빵 하나, 달걀 푸딩 하나 이렇게 두 개만 딱 계산했다. 아휴, 저녁에 숙소에서 빵을 한입 베어 물자마자 얼마나 후회했는지. 세상에 입에 촥촥 감기는 맛이며, 기분 좋은 단맛과 비리지 않은 달걀향, 속은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우면서도 또 겉의 테두리는 쫀득하면서도. 아, 입이 즐거웠다.
빵을 사서 가방에 넣고, 슬렁슬렁 걷다가 배달기사님들이 모여 있는 곳을 기웃거렸다. 아, 저거 빵 이름이 있었는데 뭐였지? 홍두병!! 배달기사님들이 엄청 많이 가져가시는 거다. 한 봉투에 최소 열 개씩은 담겨있는 듯 봉투가 축 처져 무거워 보였다. 팥, 커스터드, 돼지고기 세 가지가 있었는데 나는 팥과 커스터드를 각각 1개씩 구매했다. 그리고, 이런 건 뜨거울 때 먹어야지 하고 가게 앞에 앉아 바로 한 입 물었다. 보이는 것보다 더 알찬 내용물. 속이 정말 꽉 찼다. 엄청나게 맛있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하나에 NT$18의 가격이었고, 이것마저 며칠 전에 가격이 오른 거라며 게시판에 붙어있었다. 간이 세지 않고 슴슴허니 허기를 달래기엔 딱이었다.
+ 어제, 그러니까 12/20 금요일
다른 지역에 와봤으니 여기의 야시장도 구경해야지 하고선 들린 야시장. 역시 무료로 버스를 이용해 도착했다. 친근감 있는 이름의 동대문야시장. 타이베이에서 방문한 야시장들보다 크고 넓었다. 길이 넓어서 사람들끼리 부딪힐 일이 없어 좋았다. 여기도 물론 다양한 것들을 판매하고 있었고, 타이베이와 비슷한 먹거리들이 즐비했다. 여기서의 득템은 역시, 구아바.
추가 봉투는 필요 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가방에 작은 에코백을 들고 다녀서 아까 TOP에서 산 빵이며 이것저것 다 에코백에 넣고 다녔다. 과일가게 상인분은 나를 유심히 보더니 어디서 왔냐 물었고, 한국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고마워요."라고 줄줄이 말했다. 그리고 대도시가 아닌 이곳에 관광객이 있다는 걸 신기해했다. 최근엔 관광객이 많이 줄었단다. 아마, 지진 때문에 화롄은 볼거리가 없어졌기 때문이지 않을까. 슬프면서도, 참, 맛있었다. 진짜 구아바, 너무 사랑해.
슬렁슬렁 낮부터 시작해서 저녁까지 여유롭게 돌아다닌 날.
목적지가 있는 여행도 좋지만,
슬렁슬렁 걸어 다니며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재미는 못 따라오지.
화롄은 나에게 '내일이 기대되는 여유의 여행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