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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송비 Apr 08. 2018

영원함에 대해

그런 건 없다

어렸을 땐 필요없는 물건이 생기거나 쓰던 게 쓸모없어져도 잘 버리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나중에 우연히 보게 되면 좋을 것 같았다. 수년 뒤에 그것을 실제로 다시 보게 되면 반응은 두 가지이다. '그래 이건 이래서 남겨뒀지.' '이걸 왜 안 버렸지?' 그래서 내 물건이 있는 책꽂이와 선반은 늘 지저분했다. 오래된 것들을 가지고 있으려면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작년에 부모님의 집에서 나오게 되고 그 집은 세를 놓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정리해야 했다. 그 집에 오래 살았으니까 묵혀둘 수 있던 것인데 이사하면서 다 들고 갈 수는 없었다. 꽤 많이 버렸다. 남겨두는 순간에는 모두 소중한 것들이었는데 결단의 순간에 이르자 가차없이 버려졌다.

고3 때와 대입 재수를 할 때 풀었던 모의고사 시험지들을 그제서야 버렸다. 파일로 묶은 게 20여개 정도되었다. '수학의 정석' 같은 책들도 버렸다. 수능이 끝난 후에도 나는 많은 것을 남겨두었다. 다시 보지 않을 문제집과 참고서들을 다 남겨두었다. 갇혀서 공부만 하던 그 시절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었다. 힘들었던 순간들을 전시하여 내가 고생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환기시키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수능의 흔적들이 없어지기 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들을 하나둘씩 버리기 시작한 건 '수능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이후였다.

20대 때는 영수증을 모았다. 열심히 모으진 않았다. 주머니에 들어 있으면 쓰레기통에 넣지 않고 신발상자에 담았다. 예전 애인 중 한 명이 영수증이 담긴 신발상자 3개를 보고 기겁을 하면서 다 버리라고 했다. 버리지는 않았고 대신 더 이상 모으지 않겠다고 했다. 그것도 부모님집을 나오면서 버렸다. 영수증을 모은 이유는 내 인생을 다시 추적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영수증엔 구입한 물건과 금액, 사용한 시간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버리기 전에 몇몇 영수증을 보면서 누구랑 먹은 밥인지, 왜 멀리까지 가서 샀는지 같은 것들을 떠올렸다. 영수증을 통해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건 맞다. 이제는 그런 게 별로 중요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여전히 잘 버리지 않는 사람이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잘 버린다. 과거의 축적이 영원함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늘 그 사람과 영원하길 바랐다. 이 사람이라면 오래오래 함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별을 할 때마다 세상엔 그런 건 없다는 걸, 적어도 나에게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에도 지금의 연애가 영원할 것이라 믿으면서 연애를 시작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누군가 나이를 물어보면 예전처럼 빠르게 대답하지 못한다. 숫자는 틀리지 않게 금방 떠올리지만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한 박자 느린 대답이 나온다. 나는 20대 후반부터 성장하지 않은 것 같다. 어렸을 때 본 30대들은 지금의 나보다는 더 어른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내가 삼십엑스라니. 입이 바로 떨어지지 않는다. 영원할 것 같았던 20대는 한참 전의 일이다. 이제는 남은 30대를 어떻게 잘 보낼지 고민하고 있다. 40대가 되면, 지나간 30대를 아쉬워하기보다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그때는 더 익숙해져 있지 않을까. 그때 다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가소로울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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