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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송비 May 05. 2018

버라이어티

버라이어티. 좌우명이자 인생의 지향점이자 삶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티비에서 하는 버라이어티를 즐기지는 않는다. 


1. 108개의 이름

PC통신 시절(이때는 매우 어렸다)부터 시작하여 지금의 스마트폰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공간에서 나에게 별명을 요구하였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좋아하는 것이 바뀌고 사상이 바뀌고 만나는 사람이 바뀌면서 새로운 공간에서 별명을 내놓으라 할 때 별명이 바뀌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부모님께 받은 이름으로 사는 자아가 있고, 각각의 공간에 맞춰서 보여줘야 하는 내가 있다. 이름은 곧 아이덴티티이기 때문에 다른 공간에서 같은 이름을 쓰는 일은 거의 없다. 여기에서의 나를 저쪽에서도 이어서 사용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새로운 이름을 고민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외모로 인상을 주기에는 부족하니 이름으로라도 어떻게 잘 해봐야 한다. 회사에서 쓰는 이름을 지을 때는 책을 사서 보기도 했다. 영어 이름 작명에 대한 책이었다. 아직도 집에 어딘가에 꽂혀 있을 것 같다. 책에 있는 이름으로 짓지는 않았다. 이름을 지을 때 이름이 주는 '인상'에 대해선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제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진 이름이라고 해도 이름이 주는 인상이 좋지 않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회사에서 쓰는 이름을 지을 때 고려한 것이 있다면, 1) 발음에 이견이 없을 것 2) 내 이름과 초성으로 시작할 것 3) 나의 세대에서 친숙한 이름일 것 4) 적은 수의 사람이 사용하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 쓰고 있는 '배송비'라는 이름을 지을 때는 1) '전기성' 같은 이름을 짓고 싶었고 2) 흔하게 쓰는 다른 의미가 있기를 바랐고 3) 성(여기서는 배)을 떼면 나름 귀여운 이름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언제까지 이 이름을 들고 다닐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아이덴티티를 가져야하는 공간에서는 계속 이 이름을 쓸 것 같다. 이건 회사에서의 내가 아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실제로 별명이 108개까지 되는지는 모른다. 많다는 느낌을 주는 숫자라서, 100보다는 많고 싶고, <머털도사와 108 요괴> 때문인지 몰라도 별명이 108개라고 하면 조금 요괴 같은 인상을 주는 것 같아서 108개라고 써보았다. 

2. 넓고 얕기 > 좁고 깊기

아는 척하는 걸 좋아한다. 아는 척을 잘하려면 자세히 아는 것보다는 조금씩 주워담아야 한다. 그래서 전혀 나랑 상관없게 들리는 얘기여도 주의 깊게 듣는다. 이를 테면 부동산 얘기 같은 것. 부동산이야 말로 나에게 있어 허황되기 그지 없는 일이지만 일단 들어두면 어디가서 얘기하기가 좋기 때문에 잘 들어야 한다. 다른 모임에 가면 높은 확률로 등장하는 소재이기 때문에 한마디라도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거의 하지 않고 관심 없는 것들 낚시, 자동차, 당신의 취미(?)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대화에 있어서 매우 불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는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재미없는 얘기도 재밌게 듣는 방법 정도로 해두겠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지루해하는 대화는 나랑 별로 상관 없는데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얘기이다. 파주에 땅값이 올랐다는 얘기는 처음 들으면 흥미롭지만 두번째 들을 때는 그냥 그렇다. 세번째 들을 때는 아마 나도 엄청 잘 아는 것처럼 흥분해서 같이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체적으로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3. 안 가본 곳에 가기

미성년 시절, 청춘 드라마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도 단골 술집을 만들어서 사장님하고 대화도 하고 안주도 서비스로 많이 받고 나를 보려면 그 술집에 가면 된다고 친구들이 말하고 다녔으면 좋겠다.' 그때는 내가 나를 잘 몰랐다. 아무리 좋은 곳이어도 자주 가면 금방 질렸다. 게다가 사장님이 아는 척을 하면 너무나 부담스러워서 다음부터 가기가 꺼려졌다. 특히나 (술집) 사장님이 "오랜만에 오셨네요."라고 하면 그 사이에 다른 술집에 갔던 기억들이 떠오르고, 내가 안 와서 매출이 떨어졌나 같은 의미 없는 죄의식 같은 게 들면서 불편한 미소를 짓고 "아... 네 ^^" 라고 대답하고는 다음부터 가지 않았다. 술집 사장님과 친해지는 건 글렀으니 친한 친구가 술집 사장님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와 가까운 어느 곳에서.

가던 곳을 주로 찾는 경우는 혼자 밥 먹으러 갈 때이다. 혼밥은 가능 여부와 분위기 같은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4인용 식탁만 있는 가게인데 항상 손님이 많다거나, 1인 메뉴는 매우 제한적이라거나, 어쩌다보니 1인으로는 잘 가지 않는 곳이거나, 혼자 오는 손님을 별로 안 좋아하는 곳이라거나. 이런 것에 대한 정보를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 얻어내기란 쉽지 않다. '혼밥러'들은 왜 정보 공유를 잘 하지 않을까. 심도 있게 누군가 연구해주길 바란다. 혼밥도 너무 자주 가면 사장님이 아는 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몇 군데를 정해놓고 로테이션을 돌려야 한다. 사장님이 말 시키는 순간 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리고 그러면 선택지가 줄어들게 된다. 오랜만에 혼밥했다고 혼밥 얘기를 길게 해봤다.


4. 인생 버라이어티

매일 새로운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들을 동경한다. 나도 이것저것 다 잘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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