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엔 라이온킹이 살고 있다. 호기심이 많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으려 들고, 쭈구리 시절이 있기도 했지만 혈통이 왕인지라 늘 당당하다. 오늘로써 빛이 닿는 곳을 모두 평정했다. 드디어 싱크대 위로 올라올 수 있게 되었다. 칼이 놓여진 도마 위로 점프를 뛰는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 놀란 건 나뿐이고 라이온킹은 당당하다. 옆에서 내가 설거지를 잘하고 있는지 감시했다.
라이온킹은 본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지 아닌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자가 그렇듯 알면서도 무시할 가능성이 크다. 감히 왕의 이름을 불러서 무시하는 건가. 아무리 불러도 반응하지 않지만 내가 냉장고 문을 연다거나, 밥이 있는 방에 들어가면,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간에 귀신같이 나타난다. 나타나서 소리를 지른다. 그것은 종종 큰 위협으로 다가와서 먹을 것을 내어주지 않을 수 없다. 드... 드리겠습니다.
왜 아침만 되면 침대 위에서 용맹을 과시하는 것일까. 아침도 아니다, 새벽이다. 덕분에 지난주엔 무려 4일이나 일찍 일어나서 이른 출근을 할 수 있었다. 발가락이나 손가락을 물거나 침대를 가로질러(내 몸을 딛고) 소파로 갔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온다. 옆에서 잘자는 고양이에게 시비를 걸어 레슬링을 한다. 심지어 침대로 뛰어 오르다가 자고 있는 내 팔을 발톱을 찍기도 했다.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과 관계 없이 당당하다. 룰을 깨부수고 집단을 혼란에 빠뜨린 다음 당당하게 나타나는 자, 그가 바로 라이온킹이다. 우리집에 살고 있다.
문화의 날(매월 마지막 수요일)에 개봉을 하여 무려 휴가까지 내고 봤는데 매우 성공적이었다.
워낙 잘 만들어서 할 말이 많지 않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정말 잘 알고 있다. 잘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 같다. 영화 잡지에 광고 하나 없는 것을 보면 그렇다. 긴장감 + 재미에 신파를 빼고, 한국의 가족애를 잘 넣었다는 생각이 든다. 엔딩에 이승환 님 노래가 나오는데 좋아서 끝까지 듣고 나왔다. SOS의 모르스 부호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될테니 교육적이기도 하다. 임배우 님의 연기가 어마무시하다. 온통 칭찬할 구석 뿐이구만. 개봉 첫날 봤는데 보자마자 천만 영화가 되겠구나 싶었다. 천만 영화가 여름에 나온 적이 많다고 하니 기정사실이 아닌가 싶다. 임배우 님 천만 배우되신 걸 미리 축하드립니다.
예매부터 호러였다. 예매를 하면 오늘 날짜를 보여주고 없으면 없다고 나와야지 가장 가까운 날짜로 가버리면 내가 아침에 정신이 없어서 그냥 예매를 해버리고 허탕을 치지 않겠습니까. 2주 전에도 그랬는데 똑같은 일을 한 번 더 겪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왔다가 밤 9시에 신촌 메가박스에서 영화를 봤다. 이것이 삼고초려인가. 하지만 예매가 망한 것은 영화관의 잘못도 아니요, 내 잘못도 아니요, 모두 아리 애스터 감독 때문이다.
신촌 메가박스는 신촌 기차역(현재는 경의중앙선) 상가 건물에 있다. 큰 건물에 오직 메가박스만 있다. 그럼 상가 건물이 아니라 메가박스 건물이어야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 와중에 메가박스는 잘 되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밤 9시에 바라본 건물은 우중충했다. "유치권 행사 중"이라는 커다란 현수막과 메가박스는 운영 중이라는 조그만 안내판을 볼 수 있다. 건물은 우중충한데 메가박스 입구가 밝게 빛나고 있어서 입구를 못찾을 수가 없었다. 이 동네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모두 아리 애스터 감독 때문이다.
영화 중간부터 감독을 욕하기 시작했다. 웬만해선 영화를 보다가 눈을 감지 않는데 (물론 눈을 감을 만한 영화를 잘 보진 않지만), 너무 고통스러웠다. 미드소마 제작기에 "감독의 악취미를 짐작하게 한다"라는 문장이 있는데, 그렇다 정말 악취미다. 이럴 때 쓰는 표현이다. 끔찍한 시체의 비주얼과 화창한 대낮에 집단이 보여주는 비상식적인 장면들 때문에 내내 긴장을 하면서 봤다. "왜 저러지? 왜 저러지? 으악. 왜 저러지? 으악. 왜 저러지? 으악..." 지루할 틈이 없이 영화가 끝났고, 끝나자마자 욕을 할 곳을 찾다가 트위터에 감독 욕을 했다.
등장인물들의 불행의 이유를 굳이 찾자면 논문 때문이다. 인류학자가 되기 위해 논문을 써야 하지만 잘 써지지 않는 상황에서 대박 아이템이 등장했고 그만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다. 대학 시절 한 교수님께서 "우리 연구실 학생들한테 졸업논문 대신 저기 산에 가서 땅을 100m 파면 졸업장을 준다고 하면 대부분 땅을 파러 갈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대학원 졸업하신 분들을 존경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