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송비 Sep 01. 2019

우리집

초등학생 시절과 우리집의 교집합은 문방구다. 우리집은 문방구였다. 방이 딸려 있는 가게였고, 위층엔 친척이 살았다. 학교 바로 앞에 있는 문방구는 아니었지만 나름 목이 좋아서 아침엔 수많은 손님들을 뚫고 학교에 가야 했다. 8시 40분까지 등교 시간이었고, 8시부터 30분 정도는 엄마와 아빠는 정신없이 바빴다. 아마도 낮엔 매우 한가했다가, 하교 시간이 되면 잠깐 바쁘고 해가 지면 손님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먹고 사는 게 가능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그러다 5학년 즈음 아빠는 직장을 구해서 일을 하시고 가게는 거의 엄마가 맡았다. 나도 가게를 꽤 자주 봤다. 친구들이 손님으로 온 적도 많았다. 이상한 손님을 만나본 기억은 별로 없다. 엄마 아빠는 꽤 있을 것 같은데 딱히 들어본 건 없다. 

6학년 때 IMF가 찾아왔다. 별일은 없었다. 간신히 수도권 취급을 받는 도시의 작은 문방구는 매출이 조금 떨어지는 정도였다. 이미 아빠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고 회사의 복지가 줄어들긴 했지만 역시나 큰 타격은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집에 당장 큰 영향을 주진 않았다. 문방구는 그 이듬해까지 하고 끝났다. 정확히 왜 접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근처에 알던 문방구들이 하나 둘 없어지고 있었다. 우리 가게는 없어지진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인계를 했는데, 곧 없어지긴 했다.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문방구들을 보고 있으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세대의 아이들에게도 매력적인 장소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집이 문방구를 해서 좋았던 건, 장난감을 도매가로 살 수 있었다는 점인 것 같다. 엄마 아빠도 부담이 덜하지 않았을까. 미니카가 유행하던 시절에는 15대 정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레고도 엄청 많았다. 단점이라면 좋은 건 가질 수 없었다. 팔아야 하기 때문에. 베스트셀러는 소유하기가 어려웠다. 준비물도 당연히 다 집에 있어서 까먹지만 않으면 됐다. 물론 이 때도 잘 팔리는 예쁜 것들은 가져갈 수 없었다. 예를 들어 4절 색지를 가져가야 한다고 하면 어린 마음에는 형광색 계열을 가져가고 싶지만 모든 어린이는 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형광색은 손님에게 양보하고 남는 색 중에 적당히 챙겨갔다.


그 시절의 친구들은 학년따라 매번 바뀌었던 것 같다. 정말 친했던 친구를 다른 반이 된 후에 어쩌다 만나게 되면 정말 어색해했던 기억이 많다. 친구를 사귀는 데에 있어서 집이 문방구라는 게 딱히 장점이 되진 않았다. 기억나는 몇몇 친구들이 있지만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는 없다. 동네가 좁아서 초,중,고를 같이 나온 친구들이 몇 있는데 그들은 중고등학교 때 친해졌고 초등학교 때부터 친하진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그때는 정말 단순했다. 지금이라고 복잡한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는 잴 줄 알고 눈치도 약간은 있다. 

한번은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가 전학을 간 친구(이하 J)가 4학년이 되어 나를 찾아서 우리 가게로 놀러온 일이 있었다. 내가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2년이나 지나서 나를 찾아오다니. 아무튼. 그런데 연락을 하고 찾아온 게 아니었고, 나는 그날 다른 친구(이하 L)네 집에서 놀기로 한 날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L에게 연락을 해 사정을 설명하고 J를 데리고 갔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웠던 건, J가 살던 집에 L이 이사를 온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J와 L도 금방 친해졌다. 잘 놀다가 갑자기 L이 집에 술이 있는데 같이 먹어보지 않겠냐고 했다. 레몬맛이 나는 술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좋은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걸 한 잔씩 나눠마시고 밖에 있는 놀이터로 나갔다. 가는 길에 마침 J가 동네에서 친하게 지냈던 누나를 만났다. 서로 근황을 얘기하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장난기가 엄청 치고 올라와서(아마도 술 때문이었을 것이다) 'J 지금 나랑 같이 L네 집에서 술을 마셨다'고, 그 누나가 있는 옆에서 놀리기 시작했다. J의 지인 앞에서 그의 비행을 폭로함으로써 J를 곤란한 상황에 빠뜨려는 속셈이었다. J가 화가 나서 그만하라고, 안 그러면 간다고 했다. 나는 폭주를 멈추지 못하고 계속 놀렸고, J는 그대로 돌아서 가버렸다. 나는 L과 그 자리에서 당황하며 '야, 야, 어디가, 야' 이런 말만 하고 쫓아가지 않았다. J가 한참을 같은 방향으로 걸어서 오랫동안 J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뒷모습이 영화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그 때 미안하다고 하지 못한 것이 여전히 미안하다. 아마 미안하다고 했어도 그 상황을 돌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미안하다고 했어야 했다. 나는 그런 상황이 처음이라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 걸로 서로 웃기다고 깔깔거리면서 지적질을 하는 건 늘상 있는 일이었는데, 갑자기 친구가 돌아서 버리다니 그것도 내가 보고 싶다고 멀리서 찾아온 친구가.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랬다고, 이제와 변명을 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밤의 문이 열린다 / 굿바이 썸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