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점에서 만난 사람들
대구의 한 지하철 역사 안에 있던 2평 남짓한 작은 공간. 친구 ‘정자’에게 물려받아 시작하게 된 매점 알바다. 우리는 그 알바를 ‘매점수니’라 불렀다.
2012년 여름, 에어컨도 없는 매점에서 오래된 선풍기 한 대에 의지해 주말을 보냈다. 대프리카의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시급이 5천 원도 안되던 시절이었지만 손님이 거의 없는 곳이기도 했고, 가끔가다 상품 정리만 하면 되었기에 힘들다는 기분은 전혀 들지 않았다.
물론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화장실에 가야 했던 일,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기 위해 눈치를 보며 역무원께 부탁했던 일 정도를 빼면 말이다. (주말이라 은행을 이용할 수 없었다)
여름은 마침 내 생일이 있는 계절이다. 작은 TV가 있어 심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친구들이 가끔 놀러 와 말동무가 되어주고는 했다. 생일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으녕이와 구라가 시간을 맞춰 함께 놀러 왔다. 우유 박스를 쌓고 그 위에 큰 판자를 올려 나름 테이블의 모양새를 만들었고, 치킨과 햄버거를 시켜 먹으며 조촐한 생일 파티를 했다. 지금 생각하니 일터에 친구를 불러 음식을 시켜 먹다니. 20대 초반의 패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나서는 그 좁은 공간에 다양한 친구들을 초대하는 일이 늘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놀러 와!라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백화점을 끼고 있는 지하철이었기에 오며 가며 들리는 친구들이 많았다.
하루는 다른 곳에서 함께 알바를 하던 H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무려 배스킨라빈스 패밀리 사이즈를 사들고 말이다. 내 기준으로 패밀리 사이즈는 4명 정도가 모여야 먹을 수 있는 양이었는데, 그걸 사들고 온 H의 배포와 씀씀이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게다가 여러 명이 모여있을 때 지나가는 말로 언급했던 이곳을,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는 것에서 적지 않게 당황했다.
사실 H와는 밖에서 단둘이 만날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는 여럿이서 모이는 회식날에만 등장했고, 모임의 분위기를 주도할 만큼 쾌활한 성격도 아니었다. 나 역시 어릴 적 심했던 낯가림 때문에 불편한 사람과는 밥조차 먹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았으니…
그렇게 침묵이 잦았던 대화 속에서 아이스크림만 푹푹 떠먹으며 어색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H는 다음 일정이 있어 가봐야겠다며 일어섰는데, 아마 어색함을 견디기가 힘들었으리라. 아무튼 고마워, 잘 먹을게!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던 것 같다. 시간이 얼마간 지난 후, H가 사실 나를 좋아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 당시 20살이었는데 큰돈 써가며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이 좁은 매점까지 찾아올 일이 뭐가 있었겠어.
이상하게도 어린 시절에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해 주는 것, 다정한 친절을 베풀어 주는 것,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 주는 것. 이것들은 절대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게 아닌데. 감사해야 하는 것들인데. 왜 당시에는 잘 모르고, 늘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걸까. 지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H에게 더운 날 네가 사준 아이스크림 덕에 한 주 잘 보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저 죄송한데, 이거 동전으로 좀 바꿀 수 있을까요?”
매점수니로 일한 지도 시간이 꽤 지나 해를 넘긴 어느 날이었다. 내 또래의 한 여성이 매점으로 들어와 지폐를 내밀었다.
“잠시만요!”
속으로는 ‘어… 오늘 동전이 좀 부족할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며 동전을 헤아려 보고 있는 그때,
“어! 누나!”
누군가 반갑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 보니 세상에. J였다. J는 학교에서 주최한 캠프에서 촬영 알바를 하며 알게 된 신입생이었는데, 붙임성이 워낙 좋아 2박 3일 일정 동안 많이도 친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그때뿐, 캠프가 끝나고 나서는 그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그것도 매점에서 만나게 되다니.
J는 학교 때문에 대구로 이사했다. 아직 개강 전이기도 하고 주말을 맞이해 누나가 겸사겸사 찾아왔다는데, 대구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마침 우리 매점에 볼일이 있어 들어오게 된 것이다. 둘 다 신기한 마음에 근황도 묻고 그제야 핸드폰 번호도 교환했다. 그때의 인연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아직도 간간이 안부를 주고받는다.
사람의 인연이란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한다. 나 역시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어떻게 만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 만약 캠프에서 서로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면 두 번째 만남에서 J와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애써 모른 척을 하며 눈 맞춤을 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누군가와 친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상대에게 살갑게 군다거나 나서서 만남을 추진하는 것 역시 어려워한다. 그런 스스로를 알고 있어 작은 말 하나라도 거짓 없이 진솔하게 전하는 게 그나마 나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라 여기고 있다. 이게 누군가에게는 순도 100프로로 닿아 이렇게 인연을 이어갈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진실된 마음은 언제나 통한다.
그리고 그 마음은 인연을 이어주는 끈이다.
매점수니였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의 즐거움이 아직도 어렴풋이 느껴진다. 매점 덕에 혼자서 일하는 자유로움을 알게 되었고, 계절의 온도를 매일 체감하며 일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도 알게 되었다. 소중한 추억 남겨주고 긴 인연을 맺게 해 준 그곳이, 그때가 나는 가끔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