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한 희망에 취한 조직을 지키는 것은 조롱받는 설계자들이다
회의실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오를 때가 있다. 대다수가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성공을 확신할 때, 누군가 조용히 손을 들고 묻는다. 만약 서버가 다운되면 어떻게 복구할 것인지, 핵심 파트너가 이탈하면 어떤 대안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그 순간 회의실의 온도는 얼어붙는다.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벌써부터 걱정하느냐고, 다들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에 왜 찬물을 끼얹느냐고 면박을 준다.
미래의 리스크를 계산하고 계획을 세우려는 이들은 조직 내에서 종종 비관주의자나 답답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하지만 이들을 향한 불편한 시선은 상황의 본질을 오독한 결과다.
방해를 주도하는 세력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옆자리의 동료, 그리고 결정을 내리는 리더다. 이들이 설계자의 입을 막으려는 이유는 악의가 아니라 자기 보호 본능에 가깝다.
동료들이 설계자를 껄끄러워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인지적 게으름을 방해받기 때문이다. 막연하게 잘 될 것이라는 맹신은 값싸고 편안한 도피처다. 반면, 다가올 위기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작업은 지금 당장 뇌의 연산 비용과 물리적 노동력을 청구한다.
백업 데이터를 구축하고, 실패 시의 시나리오를 문장으로 적어내는 일은 고단하다. 동료들은 그 불편한 노동을 회피하기 위해, 위기를 경고하는 사람을 부정적인 사람으로 몰아세우며 자신들의 안락한 관성을 지켜낸다.
리더나 오너의 방해는 결이 조금 다르다. 이들은 종종 막연한 희망을 조직의 동력으로 삼으며, 확신을 충성심과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진다. 리더에게 미래의 위험을 지적하는 행위는 자신의 비전에 대한 도전이나, 열정이 부족한 자의 변명으로 번역된다.
목적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기를 원할 뿐, 누군가 액셀에서 발을 떼고 브레이크의 성능을 점검하려 들면 그것을 속도 저하로만 인식한다. 긍정적인 구호가 가득한 조직일수록, 위험을 직시하는 건조한 데이터는 리더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불순물로 취급받고 배척당한다.
그러나 현실의 위기는 사람들의 긍정적인 기분 따위는 배려하지 않고 찾아온다. 진짜 비관주의자는 문제가 터질까 두려워 아예 입을 닫고 방관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온갖 조롱을 견디며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수를 테이블 위에 올리는 사람은,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기를 누구보다 열망하는 현실주의자다. 이들은 값싼 희망이라는 환상에 취하는 대신, 충격을 흡수할 튼튼한 완충 지대를 설계하기 위해 기꺼이 악역을 자처한다.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실패의 하한선을 긋고 복구의 타이밍을 계산하는 이들이야말로, 시스템이 벼랑 끝으로 추락하는 것을 막아내는 안전장치다. 막상 위기가 닥치면 긍정을 외치던 목소리들은 먼저 침묵하거나 변명 뒤로 숨어버린다.
미련할 정도로 경우의 수를 계산해 둔 설계자의 도면만이 붕괴된 현장을 복구할 수 있다.
조직은 초를 친다는 비난을 견뎌낸 그들의 사유에, 생존이라는 무거운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조직이 회복하기 힘든 타격을 피하고 내일도 무사히 굴러갈 수 있는 이유는 요란한 응원가 덕분이 아니다.
남들이 앞만 보고 달릴 때, 누군가 묵묵히 뒤에 남아 닦아둔 퇴로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