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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모의꿈 Sep 24. 2021

환승연애 제작진이 간과한 무언가

30대 여성이 인기 없는 게 이해 안 되면서 이해 될 때

올해 4월에 출간된 ‘제12회 젊은 작가상’ 대상 수상작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세상에, 연수와 너가 같은 나이라니" 


장 피에르는 혼잣말처럼 한마디를 내뱉었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곱씹으며 시선을 테이블에서 창밖으로 던졌고, 또 맞은편의 중세 건물과 도로 쪽으로 옮겼으며, 그럼에도 밀려드는 부끄러움이 사라지지 않아 혼미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었다. 사실 뚜비 아래에는 내 가슴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내 가슴이 너무 예쁘다는 생각을 했고, 아무한테도 그것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내 인생의 가장 큰 비극처럼 여겨진 적도 있었다.




짧게 요약하자면 대학생인 주인공 '나'는 영화를 전공한 까리한 교수 '장 피에르'를 몰래 좋아하는데, 그 교수는 주인공의 친구인 '연수'와 비밀 연애 관계이다. ‘장 피에르’는 주인공보다는 좀 더 예쁘다고 묘사되는 친구 ‘연수’에게 관심을 보이고, 연수의 무릎과 허벅지 쪽에 손을 가져다 대는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한다. 


교수가 젊은 제자를 성적 대상화하고 성추행을 일삼는다는 것은 비판할 대상이지만, ‘나’는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며 오히려 장 피에르의 관심을 받는 ‘연수’를 동경하고 남모를 질투심을 느낀다. 왜냐, 그녀는 ‘장 피에르’의 예술관으로부터 왜곡된 섹슈얼리티를 배웠기 때문이다. 장 피에르에게 배운 많은 예술작품들은 여성을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것이 보편적 사고방식이라고 말해주었고, 장 피에르의 예술관은 그대로 ‘내’가 꿈과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이해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68쪽)


함께 떠난 프랑스 파리 여행에서 장 피에르는 뚜비 티셔츠를 입은 ‘나’를 연수와 비교하고, '나'는 그런 교수의 시선을 통해 굴욕감을 느낀다. 그리고 주인공은 ‘나’를 주체적인 여성이 아니고, 더 예쁜 쪽이 아닌 ‘다른 한 여자’의 역할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이후 나이가 들어서도 이 사고방식을 젊은 여성들에게 똑같이 적용하는데, ‘이성애’, 내지는 ‘연애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개선하지 못한다. 


문학동네의 젊은 작가상은 매년 젊은 세대들의 인식과 트렌드를 잘 캐치하고는 하는데, 이번 해는 좀 식상하다...라고 느끼던 찰나에 인기 예능인 <환승 연애>에서 작품에서 묘사한 행태를 포착하고 말았다.



소위 MZ세대의 연애 방식을 현실감 넘치게 그려냈다고 평가되며, 인기를 얻고 있는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은 출연자 '이코코'가 인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상황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코코는 14회 차 동안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까지 속마음 문자 0표를 받았다.




해외대학을 졸업해 리포터, 가수로도 활동하며 심지어 자기 브랜드도 론칭했다는 그녀는 정말 열심히 산 멋진 사람이었고, 젊은 여성들에게 충분히 롤모델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정말 예쁘다.. (여자 시선으로) 출연자 중 가장 예쁘다고 할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친근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곳에 들어와서 단 한 번도 표를 받은 적이 없다. 운이 없었다고 하기보다는, 지금 환승 연애 하우스의 모집단이 그녀가 매력을 발산하기가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 그녀는 커리어를 착실하게 쌓은 여성답게 특유의 ‘애교’나 징징거리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항상 사람들을 챙기고, 걱정을 들어주는 입장에 있고, 어른스럽게 행동한다. (그것이 30대 여성이 몇 년간의 사회생활을 통해서 배운 감정을 다스리는 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전 남자 친구 X는 20살과 비교해 코코가 "얼굴 빼고 다 바뀌었다"라고 할 정도로 '성숙'해졌다고 표현했다.


슈퍼스타 K2에 출연한 20살의 코코. 


2. 남성 출연자의 나이대가 가장 어리게는 22살부터 가장 많아봤자 31세이다. 갓 취업한 27-30살 사이의 ‘아직은’ 결혼 생활이 없는 남자들이나, 혹은 결혼 전에 자유롭게 연애를 생각하는 시기의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22살의 매력적인 미필 출연자 정권 씨..


3. 그리고 여성 출연자들도 어리다. 20대 중반으로, 아직은 사회 초년생으로 보이는 여성들 사이에서 코코는 혼자 ‘독립적’이고 온갖 사회생활과 풍파를 견뎌낸 강인한 30대의 이미지처럼 보인다. 


아무튼 이곳에서 직업적으로 성공하고, 커리어가 탄탄하게 다져지고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여성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밖에 없는 구조처럼 보인다. 남성들 모두 아직까지는 여성을 삶의 ‘동반자보다는 첫눈에 반한 매력적인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성이 짙은  같기 때문이다. 아니면 그것과 별개로 단시간 내에 호감을 표현해야 하는 연애 프로그램이라는 틀 안에서는 능력이나 경제력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클 수도 있다.


이 프로그램을 보는 많은 여성들이 20-30대 인 것이 안타깝다. 여성들에게 ‘나이’라는 엄청나게 큰 장벽을 결국 한번 더 확인시켜주는 꼴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다. 이제 30대가 되어 버린 나와 친구들 모두 환승 연애 이야기를 꺼내면 “코코가 가장 예쁜데 왜 인기가 없지?”라고 의문을 가지면서도 “나이가 좀 많기는 하지” 하고 수긍해버린다.


요즘 중, 고등학생들은 교과서의 문학작품들을 보면서 “선생님 이 문구가 ‘여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성차별 아니에요?”라고 말한다고 한다. 내가 학창 시절을 보냈던 2000년대와는 다르게 학생들은 젠더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고, 그만큼 더 날카롭게 미디어를 바라보고 있다. 존경스러울 정도다. 2015년이 되어야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감수성을 키워나간 지금의 30대들에게 오히려 깨우침을 주고 있다.


학교 안은 이렇게 빠르게 변화해간다고 하는데, 아직도 예능, 드라마 , 영화에서의 연애 서사는 많은 2030 여성들이 ‘연애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코코가 그 안에서 0표를 받고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다시 확인받는 대상도 10년 전 남자 친구이라는 사실이 조금 슬플 뿐이다


빨리 그녀가 작은 방에서 벗어나, 더 넓은 곳에서 사랑받고 자신을 알아봐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결국 그녀가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나’와 사회의 전제에서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결국 나 또한 ‘그녀는 조명등 아래에서 많은 시간들 보냈다’의 여주인공과 같은 사고방식에 이미 갇혀버린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그런 면에서 조금 진부한 트렌드처럼 느껴졌던 문학동네는 ‘젊은 작가상’이 이 시대의 화두를 정확히 담고 있다는 결론을 내려버리게 된 것이다..

(사실 나의 최애 작품은 박서련 작가의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이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길)


이제 3화 정도밖에 남지 않은 <환승 연애>가 MZ세대의 新연애 트렌드를 반영했다는 점에서는 정말 재밌게 보았으나, 코코라는 인물을 새롭게 구현하는 방식에서는 한계를 봉착했다는 점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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