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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모의꿈 Oct 20. 2021

20만 원짜리 MBTI 검사 결과

둘이 아니라 하나도 중요하다

“상대방에게 다 맞춰주는 사랑의 유통기한은 3개월뿐입니다. 그 사람의 변치 않는 고유성을 파악하고 조율해 나가야 합니다. 두 분은 다음 상담에 오시기 전까지 따로 심리 검사를 받는 것을 추천드릴게요”


원장님은 심리 검사를 마음의 CT를 찍는 일이라고 말해주셨다. 그니까 내 마음이 괜찮은지, 상대방과 관계를 맺을 때 어떤 부분이 정상 범주 내이고, 비정상적인 부분이 어떤 것이 있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셨다.


“MBTI 성격 검사와 MMPI 성향 검사를 받으시면 됩니다”


최근 유행하고 mbti 는 인간 유형을 16가지로 나눈다


 MMPI 검사는 7만 원, MBTI 검사는 3만 원이었다. 그러니까 둘이 받으면 총 20만 원이었다. (당일 상담 비용까지하면 하루에 총 40만 원 플렉스.^_^...)


‘설마 지금 유행하는 그 MBTI 검사를 돈 주고받으라는 건가? 나 ENTP인 거 이미 아는데...? 장난치시는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인터넷에서 빠르게 하는 것이랑 실제 기관에서 심도 있는 검사를 받는 것은 다르다고 하니까 일단 받겠다고 했다.


MMPI 검사는 성향 검사였고, 인터넷으로 링크를 받아서 집에서 60분 동안 100문항 정도에 답변을 했다. 검사 문항은 대략 '최근 화가 난 적이 있다',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편이다', '환각증세를 보인다' 등의 단순한 문항에 매우 그렇다~전혀 아니다 의 척도를 체크하는 것이었다.


마치 이전에 기업에서 인적성 검사를 하던 것 같아서 조금 속고 있는 기분도 들었다. 그때는 ‘일관성’이나 ‘정직성’ 검사라고 해서, 일관적으로 체크하는 것에 집중했었는데,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더 솔직하게 응답할 수 있었다.


 MBTI 검사는 따로 기관에서 진행했고, 60분 정도 소요됐다. 질문지는 인터넷에서 보는 것과 비슷했으나, 조금 더 심도 있는 질문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 검사에 다시 또 각각 10만 원을 쓰고 나니 조금 현타가 왔다. 20만 원이면 고급 오마카세에 가서 둘이 신나게 초밥도 먹고 네스트 호텔 2인 호캉스도 할 수 있는 금액이다. 조금 더 보태면 보세 가방도 살 수 있고, 프랑스 s브랜드의 고급 원피스를 살 수도 있다. 차라리 맛있는 것을 먹거나 나의 아이템에 투자를 했으면 더 마음이 여유로워져서 우리 사이가 더 좋아지지 않았을까…?


“하.. 어차피 나 ENTP 나올 텐데 돈 x랄했네…^_^”


그러나. 역시 돈은 돈 값을 했다. 결론 먼저 말하자면 역시 돈 내고 받은 검사는 달랐다. 상남친은 I에 가까운 ENTP 가 나왔고, 나는 ENTJ 가 나왔다. 지금 하고 있는 업무가 계획을 미리 짜야하는 업무라서 P가 J로 바뀌어서 나왔고, 상남친은 요새 회사에서 사람이랑 많이 일하더니 E 성향이 나온 것 같았다.


최악은 아니지만 좋은 것도 아닌 관계라고 한다


엔티제와 엔티피의 연애. 인터넷에 쳐봤으면 둘의 궁합이 어떤지 수많은 블로그들이 말해주었으리라.


“두 분의 수치는 매우 정상적으로 나왔는데요, 여기에 제가 가설과 해설을 덧붙여보았습니다”


수치적 검사가 모든 결과를 설명해주기는 힘들지만 나와 상남친을 2번 정도 관찰했던 전문가는 평이해 보이는 검사 결과에 본인의 해석을 덧붙여서 심리 해설지를 작성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커플이 아니라, 각자의 성향과 관계 맺음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와 상남친의 성격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할 때 갖는 심리 반응에 대하여 분석하기 시작했다.


"다른 수치들은 모두 정상인데 남성성 수치가 너무 높아요"


상남자의 상징 마동석 배우님


상남친은 서울 생활을 한 지 오래되긴 했지만, 경상도 출신의 남자였다. 그래서 가부장적인 문화에 익숙했고, 책임감이 과도한 편이었다. 어릴 적 복싱을 해서 그런지 '언제다 이긴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강한' 남성이었다. 그리고 그는 여성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가 많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니까 여성을 '약자'로 인식하고 꼭 도와줘야 한다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대학생 때 자신의 짐을 들어달라는 여자 동기에게 “내가 무조건 적으로 들어줄 의무는 없다”라고 거절해서 동기들 사이에서 욕먹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서 내 가방을 들거나, 내가 필요 이상의 짐을 가져와서 들어달라고 하는 것도 극혐 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정도의 짐을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가부장 사회에서는요, 남자는 남자답고 여자는 여자답다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제가 결혼할 당시만 해도 여자가 일을 하는 건 말도 안 되고, 안 사람이니까 당연히 살림을 해야 한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요? 여자들도 경제적 활동을 하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져서 역할 구분이 많이 희미해졌습니다. 남성에게도 배려하고, 양보하는 여성성이 필요하고요, 여성에게도 주도하고 이끌어나가는 남성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상남친씨는 남성성 수치를 조금 줄이고, 배려하는 태도와 이해하는 마음을 많이 가지면 좋을 것 같네요”


한 때 친구들의 이상적 남편상으로 불린 한고은과 남편


상남친은 조용히 “네..”하고 읊조렸다. 사실 그가 너무 남성적이고 가부장적이라는 것은 이미 내가 여러 차례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마 남자는 원래 그런 거다” 라며 자신의 근육 팔뚝을 팡팡 치며 남성성을 자랑스럽게 여기곤 했었다. 그랬던 그가 객관적인 MBTI 수치로 인한 팩. 트. 폭. 력과 원장님의 분석에는 수긍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학의 힘은 이런 것일까? 아니 사실 심리학은 과학의 범주이기보다는 개인을 설득하기 위해 심리를 수치화한 작업이었으리라. 그에게 이 당연하고도 자명한 사실을 인지시킨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분은 ENTJ…. 노는 것도 계획하시는 분이고, 직업적으로 성취할 가능성이 높으시네요. 상남친 분이  e라고 나오지만 이 분은 거의 i에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혼자 있는 시간에서 에너지를 느끼시는 분이라서 아마 외적 활동을 하면서 에너지를 얻는 여친분과 데이트 성향 자체가 맞지 않을 수 있겠어요"



사실 이 부분은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고 인터넷 글에서나, 평소 MBTI공부를 조금만 했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아니, MBTI를 말하지 않더라도 나는 외부 활동이나 사람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었고, 상남친은 혼자 게임을 하거나 친구들을 만나도 소소하게 보내는 편이 많았다. 그러나 진짜 돈 값을 했던 해석은 그다음부터 시작되었다.


“여자분은 욕구를 지연시키지 못하시네요.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당장 해야 한다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으시네요. ENTJ 가  리더의 성향을 가지고 있기도 한데요,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반영이 되지 않았을 때 상대방을 ‘부족하다’ 고 생각하고 그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 취급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올바른 목표가 있고, 주변 동료나 친구들에 그 기준에 맞지 않을 경우 매우 질책하는 경향도 있으시네요.”


듣다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을 할 때나 개인적 목표를 세웠을 때도 내가 세운 이상적인 목표치가 있었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자라다고 생각했다. 회사에서도 내 기준에 유능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몫을 잘하지 못한 사람은 속으로 은근 무시했다 (그것이 상사든 팀원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집에서도 남동생이 올바른 행동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누나로서 질책하기도 했다. 부정하기가 힘들었다.


원장님의 분석을 신중하게 들으면서 메모하고 있는데 오른쪽에 뭔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남친의 머리통이었다. 그는 진동 맞은 오뚜기마냥 위아래로 고개를 심하게 끄덕이고 있었다.



“맞아요 얘는 항상 저를 모자라고 멍청한 사람 취급했어요!!”

"알겠어 좀 가만히 있어.."


상남친도 지금 이 심리검사의 돈 값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동안 그도 나에게 수 없이 "너는 너무 완벽한 기준을 세워놓고 나를 질책해"라고 말했으나, '난 원래 그런 사람이야'하며 듣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직접 말한 내 심리검사의 결과니까 할 말이 없었다.


"여자분은  연대하고 양보하는 완급 조절이 필요할 것 같아요. 자신의 욕구를 모두 실현시키려고 하지 마시고요, 상대방의 수준에 맞게 자신의 욕구를 바꿔야 합니다. 설악산을 등산할 때요, 같이 가는 사람들이 중간에 지치고 힘들다고 포기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더 천천히 가거나 일부 사람들은 그냥 경치를 구경하게 두는 것도 좋아요. 모든 사람의 목표가 빠르게 정상에 다녀오는 것에 있지는 않으니까요."


순간 머릿속에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부장과 과장.. 그리고 팀원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목표로 한 것에 적절하게 수행하지 못하면 속으로 '이 빠가야..'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무시하던 것이 생각이 났다. 남동생의 얼굴도 스쳐 지나갔다. 그가 수능 성적이 나오지 않았을 때 내가 공부했던 썰을 풀면서 '누나 때는 말이야~'하던 모습이 얼마나 재수 없었을까? 순간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면서 부끄러운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요,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상대방을 이해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것이에요. 내가 관계를 맺기에 괜찮은 상태였는지, 내게 과도했던 면이 있지 않았을까, 그런 것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거죠”


그날 상담실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내가  막대한 거금을 쓰고 있는 이유는 상남친과의 관계 회복에만 목적이 있는  아니구나.


아무 물질적 소득도 없는  40 원짜리 플렉스에서, 나는 그동안  스스로와의 관계를 개선시키고 싶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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