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려 절 받기의 미학
"사람 고쳐쓰는 거 아닌데 진짜 커플 상담을 받는다고? 죽 쑤어서 다음 여친 좋으라고 하는거야?"
고액의 심리 상담을 받는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말리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나는 m상담센터의 문을 열었다.
첫날 상담은 거의 나의 하소연을 한탄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원장님은 우리를 마주 보고 앉았고 상남친(상남자+남자친구)와 나는 서로 옆에 앉았다.
“자, 두 분은 어떤 문제로 이곳에 오시게 되었나요?”
나는 이미 노트에 남친과의 문제를 20가지 정도 적어놓은 상태였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전투태세를 갖춘 상태였다. 하지만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 그것을 한 문장으로 말하기는 참 어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대답하기까지 15초 정도 공백이 있었던 것 같다. 노트에 적힌 많은 문장들을 바라보다가, 나는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입을 열었다.
“저희는 너무 많이 싸워요. 남자 친구가 저를 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정말 그만 싸우고 싶습니다 ”
저 문장을 말하면서 나는 스스로 조금 비장하고, 비참하고 부끄러워졌다. 무슨 동네 친구한테 징징거릴만한 문장을 20만 원이나 지불하고 여기 와서 말하고 있나.. '안 좋아한다고 느껴지고 그만 싸우고 싶으면 그만 만나면 되는 거잖아?' 그 간단한 답을 몰라서 여기까지 온건가.
그 이후에 나는 노트에 적어온 것들을 아주 빠르게, 쉬지 않고 10분 정도 말했던 것 같다. 화나고 잠수 타는 문제, 생일 때 제대로 준비 안 하는 문제, 다혈질, 데이트할 때 개인 핸드폰 하는 것, 표현 안 하는 문제 등등 그동안 닳고 닳도록 말해서 이제 지칠 법했던 그 화두들을 나와 원장님 사이의 테이블 위에 꺼내 놓았다.
그 이후에는 이에 질세라 상남친(상남자+남자친구)의 반론이 시작되었고, '바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부터 '친구들의 남자 친구와 나를 비교한다'까지 그동안 수 없이 들어 귀 딱지 앉은 이야기들이 반복됐다.
“………. 네”
원장님은 우리가 말하는 중간에 호응 리액션은 하셨으나, 무자비 공격 발언에 조금 지친 듯이 보였고 계속 메모를 하셨다. 친구들에게 말했으면 “와 완전 쓰레기다”라고 할 수 있는 말들을 선생님은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남친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문장에 관련해서 그녀는 나의 생일 관련 에피소드를 듣고 심도 있는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남친이 생일을 잘 챙겨주지 않고, 그런 부분에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건가요”
“네 맞아요! 저는 남친이 생일일 때 정말 필요한 것을 잘 기억해놓고 있다가 당일에 맞춰서 사주는 편이거든요. 첫 생일 때 몰래 셔츠도 골라서 줬어요! 두 번째 생일 때도 겨울 코트도 비싼 거 사주고 케이크도 맞춤 제작으로 줬어요.
그런데 제 생일 때는 케이크도 안 사주고요, 생일 선물도 제가 그때 120만 원짜리 노트북을 샀는데 거기다가 보태라고 20만 원을 제 계좌로 보내줬어요. 두 번째 생일 때도 시계 사준다고 하면서 먼저 골라주지는 않았고요, 저한테 고른 다음에 영수증을 보내라는 거예요.
그게 무슨 선물인가요 선생님??? 그리고 식당도 먼저 정해놓지 않고요, 그냥 지나다 가다 있는 곳에 가서 먹어요! 이게 안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뭘까요? ”
“그건 엄청 예전인 2-3년 전 이야기고 최근에는 네가 원해서 좋은 식당 먼저 찾아보고 이랬던 거 기억 안 나니? 그리고 너는 너가 원하는 선물 안 주면 싫어하니까 내가 그냥 돈을 보탰던 거지!”
내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를 공. 개. 처. 형 당할 수 있게 만든 것이 짜릿했다. 그동안 제 3자와 그가 있는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었고, 이게 그는 따끔한 일침을 들을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남자 친구분은 원래 성대하게 생일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시네요. 좋아하는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희 상담 센터에 얼마 전에는 결혼 5년 차? 가 되신 분이 오셨어요. 그분은 남편이 하도 생일을 기억 못 하고, 매일 까먹어서 자기 생일날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서 아침상에 올려놓았대요.
그랬더니 남편이 '아 오늘 누구 생일인가 웬 미역국~' 이러면서 미역국을 맛있게 처먹더래요.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고 진짜로 부인의 생일을 몰랐던거죠. 그래서 대가리를 쳐서 날려버리고 싶었다고 하시더라고요”
^_^... 세상에 그런 남자와 결혼해서 5년 동안 살고 있다니 그분도 대단하다.. 는 생각이 들었다.
“'저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저는 기독교는 아닌데요, 주기도문에 이런 문장 있어요.
여자 친구분이 서프라이즈로 생일 선물을 받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평소에 내가 원하는 것을 기억해놓았다가 몰래 선물로 주고,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의 식당에 가서 짜잔~ 하고 이벤트를 해주면 좋겠다.
이거 다 남자 친구의 마음을 ‘시험’하는 거잖아요. 얘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고 있나? 이런 식으로 시험하는 건 안 좋은 거예요.
정말 생일에 원하는 선물을 적어주세요, 금액대별로요.
10만 원대 - 원피스, 20만 원대 - 목걸이, 30만 원대 가방, 40만 원대, 50만 원대 이렇게 금액대별로 다 구분하시고요. 식당도 먼저 다 골라서 보내주세요. 원래 식당을 고르는 사람이 아니라면서요
그런 행동으로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를 사랑하는지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불타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3개월밖에 지속되지 않습니다.
"선생님, 근데 그건 엎드려서 절받는 거 아닌가요? 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걸요?"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 들어서 싫으시다고요? 그래도 그렇게 절 받으세요. 그것 또한 소통의 과정입니다. 관계에서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은 없어요.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람과 소통에서 맞춰나가셔야 합니다.”
상남친은 마스크 뒤로 희열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공감하기 시작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여자 친구는 어떠한 기준을 정해놓고 저에게 그것을 강요합니다!”
ㅎ ㅏ 내가 이러려고 지금 상담에 이 돈을 쓰고 있나..? 결국 이 상담으로 아무도 고쳐질 수 없게 되는건가? 현타가 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원장님 제 남자친구가 변화할 수(=고쳐질 수) 있을까요?"
"사람의 고유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특성들을 가지고 두 사람이 조율하는 과정에서 더 나은 관계가 될 수는 있겠죠."
허탈한 감정을 안겨준 200만 원짜리 첫 상담의 마지막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