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네모의꿈 Oct 19. 2021

경상도 상남자의 눈물을 보다

더 이상 돌파구가 없는 막다른 절벽에 도착했을 때

“정말 이렇게는 못 만나겠다, 우리.”

“나 너무 힘들어” “나도 정말 미치겠다고!!”


몇 번의 청춘 영화를 찍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이럴 거면 헤어져”라는 말 한마디로 이별하고, “그래 노력해보자”라는 말로 재회해, 한 밤 중에 눈물의 화해극을 찍은 지 12시간 만에 또 싸우는. 영화 <연애의 온도>처럼 매일 다투고 오해하고 싸웠다.



서른이 되어서도 나는 왜 이럴까 자괴감을 느끼며 사무실에서 몰래 눈물 흘리며 보고서를 쓰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친구들한테 한탄하는 순간 ‘손절’ 당할 것 같아서, 결국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어느 날, 자신의 슬픔으로는 절대 울지 않는다던 상남자 ‘그’가 울음을 터뜨리게 된 것이다.


“나도 정말 미치겠다고!!!!! 나도 잘하려고 정말 노력하고 있다고…!!! 으허어엉아아아아앙!!!”


내가 운 적은 몇 번 있었지만, 그의 눈물을 본 것은 3년 반의 만남 동안 처음이었다. 나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해바라기의 김래원처럼 울었다


그는 우리가 잠깐 헤어졌던 날에도, 다시 재회를 했을 때도, 준비하던 시험이 떨어졌을 때도, 친한 친구가 결혼할 때도.. 아무튼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가 혼자 울었다고 말한 건 kbs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과 영화 <아이 캔 스피크> 할머니를 보면서가 유일했다)


“ㅇ_ㅇ…..?”


그의 눈물로 인해 나는 망부석이 되어 버렸고, 갑자기 ‘이 정도'까지 된 거라면 나에게도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이르게 되었다.



복싱으로 몸을 다졌던 그 경상도 출신 이과생 상남자는 스스로 ‘자신의 슬픔에는 울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남자는 울지 않는 거야”라며 마음속 깊이 고통을 감내하고, 감정을 읽기 힘든 표정으로 묵묵하게 내일을 준비하던 사람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정말 답답하고, 비참할 정도로 슬퍼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재수생 때의 나 같았다. 언어 성적 때문에 재수를 했는데, 10개월을 공부했는데도 성적이 똑같았었다. 약 1년 간, 모의평가 분석 및 20권이 넘는 문제집 풀이를 하며 오답노트도 성실하게 작성하고, 잘 가르친다는 학원도 다녀봤는데 성적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떨어졌다. 비참함에 수능을 100일 정도 앞둔 9월에는 방에서 혼자 불을 꺼놓고 울었다.


“남들은 한국어라 공부 안 해도 1등급 나온다는데 왜 나만 맨날 이 따위인데…? 나 진짜 멍청이야? 하흐 흑!!! 죽고 싶어 정말!!!”


수능 3개월을 남기고 나는 친구 어머니의 소개로 대치동에서 '고액' 언어 과외를 받게 되었다. (울고 불고 질질 짜던 내가 불쌍했는지 부모님께서 정말 어려운 기회를 주신 것이다)


대치동은 명문대를 가고 싶어하는 학생들의 결집소였다


기억은 안 나지만 월 100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되면 난 진짜 안 되는 거다.. 벼랑 끝에서 풀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으로 1:1 과외를 시작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수능에서 언어 1등급을 받았다. 족집게라고 하기엔 그 선생님이 딱히 뭘 가르쳐주진 않았다. 그저 나의 마인드를 바꿔주고, 용기를 주었을 뿐이다. 네가 공부한 건 잘못되지 않았다고, 넌 잘하고 있고 잘할 수 있다고. 그리고 조금만 시험을 대하는 태도만 바꾸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1:1 과외에서 얻었던 것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고, 옳은 방법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우리 마지막으로 상담받아보자”


상담은 정말 마지막 보루였다. 그러니까 신구 아저씨가 <사랑과 전쟁>에서 이혼 위기 커플에게 "4주 뒤에 뵙죠"라고 하는 것처럼 중재자를 초청해서 상담을 받고, 우리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파악해 노력해보는 것이다.

사랑과 전쟁은 KBS에서 9년 넘게 방영 되었다

사실 주변에서 상담을 받았다는 커플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신구 아저씨가 조정 기간을 준다는 것은 두 사람이 이미 ‘법적인 부부로' 엮어 있기 때문에 심사숙고하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우리는 법적으로, 혼인신고로 엮어 있는 것도 아니고, 재산분할을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양육권을 다툴 아이가 없는 상황에서 상담을 받는다니. 이건 무슨 돈지랄일까.


그래도 다 큰 성인 상남자(35세)가 눈물을 보인다는 것은 나에게는 정말 큰 사건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상담을 받기로 결정했다.


"이 정도가 되면 내 문제가 아닐까?"

"친구가 아닌 제 3자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감정이 아주 강하게 느껴져서 상대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도 내 문제점을 알고 싶었다.


"야~ 세상에 남자는 많다", "싸우면 안 맞는 거야 버려!"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는 친구들의 조언은 더 이상 이 곤란하고 지긋지긋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울 여자들은 경상도 남자는 일단 거르고 시작한다는데, 어쩌다 왜 나는 거친 경상도 남자를 만나서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안 맞는 걸 맞추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니었을까?


서울여자에게 경상도 남자는 기피 대상이라고 한다



이제 지구 상에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나 밖에 없다는 기분이었다. 친구들의 조언도 위로도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우리는 이미 헤어졌다가 다시 재회한 상태였기 때문에 다시 헤어지는 건 더 힘들 것 같았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막다른 터널을 홀로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출처 동의대신문


그래, 정도까지 왔는데도 헤어지지 않기 위해 이렇게 서로의 손목을 붙들고 있는 거라면 뭔가 있는 것이다. 이 질긴 인연 갈 때까지 가보자 시 x!!..라는 오기가 생겨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  200 원만 써보자


세 달간 언어 과외를 받았던  금액, 나의 대학과 마인드를 바꿨던  금액을 나의 소중한 관계와 심리적, 물리적 안정을 위해서 투자하기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 커플 상담을 받기로 합의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