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사라진 서점을 따라가다 사라졌던 또 하나의 곳에 도착했다.
유독 바람이 강하게 지나가는 골목, 그 코너에 작은 슈퍼가 있었다. 주인이 바뀌어도 늘 그곳에 있었따. 슈퍼의 존재 이유가 내가 사는 아파트인 듯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집을 나서 골목으로 향했다. 역으로 가기 위해선 그 골목을 지나가야 했다. 봄이 오려면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지만, 그럼에도 그날따라 바람이 너무 아팠다. 두 손을 주머니에 꽂고 패딩에 얼굴을 파묻으며 걸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평일 낮인데도 불구하고 불이 꺼진 슈퍼를 보았다.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어두운 안을 가로 막는 투명한 유리문에 흰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한참을 서서 봤다.
'喪中' 잃어버릴 상, 가운데 중.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의 생김새를 안다. 자주 보아 눈에 익었을 뿐인데, 누군가를 아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그저 사모님이 괜찮으시길 바랐다. 이 힘든 이별을 이겨내고 돌아오시길 바랐으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유리문 앞에서 잠시 고개를 떨구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사모님이 겪으신 이별은 다른 형태의 이별로 이어졌다. 그 일이 있고 며칠 안되어 슈퍼가 문을 닫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줄어드는 물건들이 다시 채워지지 않을 때 뭔가 낌새를 느꼈어야 했는데 역시. 이별은 눈앞에 닥칠 때까진 실감 나지 않는 법인 듯하다.
슈퍼에만 파는 것들이 있따. 편의점에서는 팔지 않는, 그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들. 어렸을 때는 천 원짜리 쌀강정이었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아파트 놀이터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가 허기가 지면 다 같이 쪼르르 슈퍼로 향하곤 했다. 천 원짜리 쌀강정은 원기둥 모양의 강정으로 8개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천 원으로 나도 먹고 친구도 먹고 다른 친구들의 관심도 살 수 있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중학생, 고등학생 때는 편의점보다 더 저렴한 것들 위주로 공략했고 그냥 슈퍼가자는 말을 좋아했다. 작은 마트 같은 그곳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우니까.
성인이 되어서는 그곳이 어떠한 위로의 경유지가 되었다. 술을 마시면 안 됐던 나이부터 성인이 되어서도 스트레스를 다룰 줄 몰랐던 나는 계속해서 나를 안으로 몰아갔다. 어느 정도 안으로 삼키는 일에 익숙해진 최근에 들어서야 그걸 밖으로 내쫓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은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언어화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감정이 발생하면 우선 슈퍼로 향했다. 집을 가는 길이었다면 바로 슈퍼로 길을 틀었고, 집에 있을 때는 굳이 집을 나서 슈퍼로 향했다. 슈퍼에 가서 내가 겪는 감정의 정도에 어울리는 술을 골라 계산한다. 그리고 그 술을 패딩 주머니에 넣는다. 어떤 때는 작은 맥주 한 캔, 어떤 때는 주머니 하나에 소주 한 병씩 꽂았다. 그렇게 다시 집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럼 슈퍼에서 우리 집까지 3분도 채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에 내가 그럭저럭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에 스트레스가 다 해소되어버렸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탓에 언제나 주머니에 넣은 술을 전부 마셨던 적도 없지만. 그저 부정적인 감정마저 가뿐히 처리할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순간의 기분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일은 오로지 그 슈퍼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됐다. 편의점도 아니고 꼭 그곳이어야만 되는 알 수 없는 집착이었다.
슈퍼가 사라지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 골목에는 점점 더 많은 주거공간이 생겼고 삭막했던 골목은 북적거리는 거리가 되었다. 여관과 모텔, 외국인 노동자들이 전부였던 예전과 다르게 지금은 오피스텔과 빌라가 생겼고, 뛰어노는 아이들과 신혼부부, 그리고 내 또래의 젊은 친구들도 많아졌다. 이런 변화는 슈퍼가 있었던 장소에 편의점을 만들었고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건너편에 또 다른 편의점이 하나 더 생겼다. 편의점이라고는 대로변에 구멍가게 같이 좁은 한 군데뿐이었는데. 슈퍼가 사라지고 골목에 많은 편의점들이 생기면서 그 구멍가게같던 편의점도 함께 사라졌다. 이제는 브랜드 별로 골라서 갈 수 있게 되었다. '슈퍼 갈까?'라는 말에서 '편의점 갈까?' '어디 편의점 가지?'로 우리 갖고이 나누는 대화도 바뀌었다. 주머니에 들어간 술이 편의점에서 산 술이라고 위로를 얻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가끔 그곳을 떠올린다. 유독 강한 바람이 불던, 그 코너에 있던 슈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