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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진 Aug 05. 2024

일주일에 만 원

추억은 도미노

나의 첫 책은 무엇이었을까. 시간을 거슬러 내가 서점에 처음 간 날을 떠올려본다.
실패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우리 집의 전통이 하나 있다. 바로 "서점비"이다. 내가 본격적으로 용돈이라는 걸 받기 전부터 아빠는 나와 동생에게 일주일에 만 원씩 서점에서만 쓸 수 있는 돈을 주셨다. 그 돈을 우리 집에서는 서점비라고 불렀다. 서점비에는 특별한 규칙이 있다. 우선 서점비는 내 손에 직접 현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주일마다, 아빠가 정해놓은 요일(아마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에 흰 봉투 안에 만 원씩 넣어두셨다. 그 돈 봉투의 위치는 우리에게 절대 비밀이었다. 봉투에는 현금,서점비를 넣은 날짜와 총금액이 적힌 종이가 있었고 서점을 갈 때 아빠는 그 봉투를 챙겨가셨다. 일주일에 만 원이면 그 당시의 물가와 내 나이를 고려했을 때 일주일에 저렴한 책 한 권이나 2주에 한 권 정도는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너무 충분한 금액이었다.


서점비 탄생 이래 최초로 규칙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첫째, 이 돈은 서점에서만 쓸 수 있는 돈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점비라고 불리게 됐다. 둘째, 내가 고른 책이 아빠가 판단했을 때 나에게 유해하다거나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을 땐 제지 당하거나 반려될 수 있다. 여기서 파생된 규칙 셋째, 서점비로 만화책은 살 수 없다. 단 <Why?> 시리즈와 같이 교육 목적의 책은 가능했다. 마지막 규칙. 서점에서 책을 사면 책 위에 구매한 년, 월, 일과 내 이름을 적어야 한다. 이렇게 네 가지가 처음 서점비 제도를 도입했을 때 우리가 따르던 규칙이다.

사실 어렸을 때는 서점비에 대한 감흥도 크게 없었고 불만도 많았다. 꼬맹이였던 나와 동생이 가졌던 최고의 불만은 만화책을 사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서점을 가면 또래 아이들은 만화 코너에 전부 몰려있었다. 나와 동생도 만화 코너를 서성였지만 안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고 돌아서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너무 갖고 싶은 만화가 있다면 아빠에게 검사를 받았다.

"아빠 이거 사도 돼?" 라고.


내가 유일하게 샀던, 아빠의 검열을 통과했던 만화책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아마 아직 책장에 꽂혀있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 거겠지만. 바로 오진희, 신영식 작가의 <짱뚱이>였다. 여름 방학마다 시골 외할머니 댁에 내려가 시골 생활에 익숙했던 나는 <짱뚱이> 속 시골 마을이 마치 엄마의 어린 시절을 훔쳐보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한 여름 거실에 배를 깔고 엎드려 읽고 나서 너무 재밌었던 그때의 나는 최초로 만화책을 한 편 더 샀다. 그렇게 <짱뚱이>는 내가 10살 때 부평 문고에서 11번째로 산 책이 됐다. 11번째로 산 책인 걸 어떻게 아느냐고 묻는다면 책에 쓰여있기 때문이다. 아빠가 나 대신 쓰신 듯하다. 누리끼리해진 종이에서 알 수 있는 세월의 흔적. 헌책방에서나 발견할 수 있을 법한 느낌이다.



11살을 넘어가고 나선 날짜를 써야 한다는 마지막 규칙이 사라졌다. 아마 한 번 갈 때마다 너무 많은 책을 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부평 문고에서도 책을 산 날이 각인된 도장을 찍어주셨기 때문에 굳이 손으로 쓰지 않아도 책을 언제 샀는지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나는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장래희망 칸에는 '화가' 대신 '패션디자이너'라는 단어가 들어섰다. 그맘때쯤 서점에 가면 만화는 이제 시시해지고 화려한 패션이 그려진 일러스트북이나 그런 것들을 참고할 만한 패션 잡지 앞을 서성였다. 이렇게 나와 동생이 각자가 관심 있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우리가 서점비로 살 수 있는 대상의 범위도 함께 넓어졌다. 잡지부터 시작해서 그림 그릴 때 필요한 라이트박스까지. 동생은 어려운 퍼즐부터 음악을 시작하면서는 베이스 기타까지.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아빠는 서점비라는 이름의 돈으로 우리의 꿈을 지지해 주셨다. 시간이 흐르면서 많은 예외가 생기고 규칙이 수정되고 바뀌었지만 내가 25살이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일주일에 만 원씩 채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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