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우리 집은 텔레비전이 없었다. 거실에는 언제나 거대한 책장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동네 아이들이 우리 집에 와서 책을 빌려 갔다. 아마 돌려받지 못한 책들이 꽤 많겠지만 나와 동생은 가지고 있는 책에 비해서 독서가 취미라고 하기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진정한 책벌레들에게 우리 집은 보물창고였다.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앞으로도 쭉 우리 집 거실에는 텔레비전 대신 책장이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우리 가족 모두 텔레비전이 있는 거실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랬던 우리 집 거실에 2022년, 책장 대신 텔레비전이 생겼다. 남들은 이제 텔레비전을 치우고 거실에 책장을 두는 게 유행이라는데 우리 가족은 시대를 역행했다. 책장을 빼면서 정말 많은 책을 정리했다. 정말 어렸을 때부터 모았던 책들이라 요즘 구하기 어려운 책들도 많았다. 전집이나 시리즈들은 그 책이 필요한 곳에 다 보내줬고, 헌책방에 보낼 수 없는 책은 버리고, 버리기 아까운 책은 각자 방으로 가져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버려진 책이 아깝다기보다는 그 책에 담긴 추억들이 아쉽게 느껴진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서점의 책들 중에서 간택 당하여 나에게 온 한 권 한 권이 당시 내 최대 관심사를 대표하고 있으면서 부평 문고를 대표하고 있는 책이 되어버렸으니까. 버려지는 책들을 고르고 또 골라서 내 방으로 조금 가져왔다.
그랬더니 내 방이 작은 서점이 되었다. 그렇게 책들은 조금씩 늘어갔고 책장이 생기고 칸을 늘리고. 여러 겹으로 겹치고. 내 방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은 점점 내가 되었다. 한 사람의 책장을 보면 관심사와 철학과 신념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몇 칸 되지 않는 사각형들이 나의 전부가 되었다.
지금도 조금씩 나를 채워가고 있다.
우울과 방 청소의 상관관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거다. 방이 지저분하면 우울해지는 것 혹은 우울하면 방을 치울 기력조차 없고 지저분한 게 아무렇지도 않아진다는 이야기. 특이하게도 나에게는 책장과 나 사이에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평소에는 책장을 최대한 깔끔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깔끔을 넘어서 예쁘게. 하지만 학기 중, 정말 바빠지게 되면 늘어나는 책을 마음이 따라가지 못해 책장이 정말 지저분해진다. 지저분한 책장을 매일 외면하지만 어질러진 책장은 어질러진 내 마음과 같아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른다. 그저 종강하면 정리해야겠다는 다짐 뿐. 특이한 취미라고 한다면 가끔 마음이 답답하거나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책장을 정리한다는 거다.
한때 이동진 평론가의 파이아키아 공간에 깊은 감명을 받아 내 방의 책도 색깔 별로 정리했던 적이 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고 책을 읽는 시간보다 침대에 걸터 앉아 책장을 바라보고 앉아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냥 보기만 해도 너무 좋은, 한 편의 명화 같은 느낌이랄까. 그때부터 나는 기분 전환을 책장 정리로 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괜스레 슬퍼지려고 하면 미친 사람처럼 책장에 있는 모든 책을 꺼내 새로운 규칙으로 책을 정리한다. 그러고 나면, 한바탕 정리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분명 달라진 건 책의 위치뿐인데 새로운 책장을 들여온 것처럼 내 방이 새로워진다. 비록 거실에 텔레비전을 없애는 유행은 역행해버렸지만, 각자 좋아하는 공간을 집으로 들려오는 인테리어 유행에 발 맞췄다. 홈 카페, 홈 바, 홈 짐, 홈 시어터, 홈피시방, 홈 오피스··•에 이은 홈 북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