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도미노
서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아빠와의 추억이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우리의 어린 시절과 관련이 있는데 우리가 어릴 때는 항상 아빠보다 엄마가 더 바쁘셨기 때문이다. 지금은 조금 나아지셨지만 엄마는 토요일에도 출근하는 날이 많았다. 남은 셋이 엄마 없는 지루한 토요일을 보내는 알찬 방법이 바로 서점이었다.
우선 느지막이 일어나 아점을 먹는다. 그 후 주섬주섬 옷을 입고, 셋이 손을 잡고 서점으로 향한다. 한여름의 서점은 은행만큼 시원하다. 무더위로 인해 푹푹 찌는 집을 벗어나 서점으로 피난 간 것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나보다 키가 큰 책장들 사이를 요리조리 다니는 일만큼 신나는 건 없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예쁘거나 제목이 흥미롭거나. 예를 들면 <창가의 토토>라는 책은 우리와 함께 사는 반려 토끼의 이름이 '토토'였기 때문에 '창가의 토토'라는 말이 귀여워서. <유진과 유진>이라는 책은 내 이름이 유진이여서. 웃기지만 대부분 이런 식이였다.
그렇게 서점에서 가장 뜨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고 나서는 책이든 뭐든 각자 하나를 산 다음 부평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다 같이 동인천 급행열차를 탄다.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방향과 달리 동인천 방향으로 가는 주말의 지하철은 한적하다. 그리고 급행의 지하철은 에어컨도 빵빵했다. 우리 세 명은 지하철에서 더위를 식히며 아까 서점에서 산 책을 읽는다. 책을 읽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함께 떠들다 보면 종점인 동인천 역에 도착한다. 이때가 제일 재밌다. 모두 내리라는 안내방송을 듣고 우리도 슬쩍 내리는 척을 한다. 그 게이트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가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골라 다시 지하철을 타는 거다! 동인천 역에 도착한 동인천 급행열차는 잠깐의 쉬는 시간을 가진 후에 다시 용산행 급행열차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하철이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는 게 너무 신기했다. 우리만의 움직이는 비밀 아지트였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들고, 아무도 없는 지하철에서 여기 앉았다, 저기 앉았다 하는 일은 최고의 놀이터이자 길고 긴 지하철에 우리 밖에 없는 것 같은 느낌. 그게 좋았다. 가끔 엄마가 늦게 오셔서 토요일의 저녁도 우리끼리 해결해야 하는 날이면 조금 스케줄이 달라진다. 동인천 역에 내려서 차이나타운과 월미도를 구경하는 날이다. '바다 그림 그리기 대회'를 참여한다거나, 월미도에 있는 놀이 기구를 타본다거나, 벽화 마을 구경하고, 차이나타운에서 짜장면을 먹으면 하루가 끝난다. 매주가 최고의 토요일이었다.
추억은 도미노다. 작은 하나를 떠올리면 관련된 추억이 와르르 쏟아진다.
엄마는 월요일마다 저녁 회의가 있어서 야근을 하신다. 그럼 또 셋이서 저녁을 먹어야 했고 우리는 월요일마다 메뉴를 고민하는 게 힘들었다. 그 당시에는 배달의민족도 나오기 전이라 직접 해 먹거나 포장해 왔어야 했다. 그래서 결국 아빠가 하나의 요리를 배워 월요일마다 우리에게 해주기로 했다. 그 요리는 바로 카레였다. 카레라이스. 그래서 우리는 놀랍게도 월요일마다 카레를 먹는 날이었다. 아빠의 카레는 매주 발전해 갔다. 그 계기로 내가 지금까지 제일 좋아하는 메뉴가 카레일 수도 있겠다. 사실 질렸던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한 번 질렸을 때 꽤 오래 카레를 외면했던 것 같다) 온 가족이 카레에 질렸을 땐, 집 앞 김밥 집에서 음식을 포장해 와 먹었다. 퇴근하시는 아빠를 마중 나가 그 가게에서 만나 메뉴를 정하고 포장해 오는 일을 또 월요일마다 반복했다. 또 오랜 날 동안 그 김밥 집을 다니다가 질려 다른 곳으로 갈아탄 지 얼마 지나니 않아 사장님의 건강 상의 이유로 그 김밥 집이 문을 닫게 됐다. 사라진 그곳이 갑작스럽게 기억난다. 정말 많은 곳들이 사라졌었구나.
사실 우리 집은 지금도 월요일마다 엄마는 야근하신다. 유일하게 배달시켜 먹어도 혼나지 않는 엄마 없는 월요일 저녁이다. 그리고 금요일만 되면 엄마에게 토요일에 출근하시는지 여쭤본다. 내일은 엄마도 나도 바쁘지 않은 토요일이다. 내일은 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알찬 토요일일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