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유진 Aug 26. 2024

봉인된 책

추억은 도미노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예술고등학교 였던 학교 특성상 오전 수업이 끝나면 각자의 실기실로 가서 실기 수업을 한다. 디자인반 친구들과 마주보고 앉아 다 같이 그림을 그리면 수다 한바탕이 펼쳐진다. 학교 이야기부터 수능 이야기, 중학생 때, 초등학생 때, 어렸을 때까지 옛날 얘기를 하면서 떠들곤 한다. 그러던 중 서점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고, 자연스레 서점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떠오른 일화가 생각났다.


서점비 규칙 둘째. 내가 고른 책이 아빠가 보시기에 유해하다고 판단되면 살 수 없다는 규칙. 그 규칙의 정점을 찍은 일이 있다. 여느 때와 똑같이 책을 한 꾸러미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나 아빠가 나를 부르셨다. 내가 산 책 중에 하나를 읽어보았는데 이건 지금 읽으면 안 된다는 거다. 사실 그때의 나는 책을 읽는 재미보다 사는 재미에 빠져있었고 그 몇 권의 읽는 책마저도 쉬운 책만 읽었다. 당연하다 5학년이었으니까. 그래서 아빠가 책이 어쩌고저쩌고 지금 읽으면 안 된다 말씀하실 때 별 관심이 없었다. 처음부터 크게 읽고 싶어하지 않았던 책이었던 것 같다. 결국 그날 이후 나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아빠한테 봉인당했다. 테이프로 칭칭 감긴 채로..

봉인된 책의 제목은 <날라리 인 더 핑크>. 친구들에게 옛날 얘기를 하다 이 일이 떠올랐고 친구들에게 알려줬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우리 집에 테이프로 꽁꽁 싸매어져 봉인된 책이 있다고. 애들은 박장대소를 했다. 아이들은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했고, 테이프로 싸매진 책의 모습도 궁금해했다.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당시 우리 집의 모든 책은 거실에는 있는 책장에 꽂혀있었기에 그 어딘가에 봉인된 채로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 집에 가서 책장을 샅샅이 살펴보았고 결국 찾아냈다. 봉인된 책을. 

대략 8년 동안 봉인되어 있었다.




"이 책은 평범한 10대가 어떻게 날라리가 돼가는지를 보여줍니다. 날라리에게도 삶은 있다는 관점에서는 좋은 책이나.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할 사춘기와 그 이전에는 굳이 볼 필요가 없고 되려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성인이 되었거나. 친구 중에 가출한 사람이 있거나. 자기가 더러운 쓰레기가 되었다고 생각 될 때나 읽기를 추천합니다. 결혼 한 다음 학창시절을 되돌아 보며 읽으세요. 2011년 10월에. 아빠가."


멘트가 심상치 않다. 아빠에게 이 책 봐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친구 중에 가출한 애가 있는지 혹은 스스로가 더러운 쓰레기가 된 것 같냐는 장난스러운 답변이 돌아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으로 들어와 인증샷을 찍은 후 칼로 조심스럽게 떼어내어 책의 봉인을 풀었다! 8년 동안 너무 답답했지. 책아.

그러고 나서는 앞의 몇 장을 읽어봤다. 시기상조였다. 8년 동안의 엄청난 빌드업이었지만 나의 구미를 강렬하게 당기지 못한 책은 다시 책장으로 들어가게 됐다는 허무하고도 슬픈 결말이다. 시간이 지나 아빠가 봉인을 풀고 읽어봤냐고 물어보셨을 때 나는 멋쩍게 웃으며 '아직..'이라고 했다.

이 일화는 앞으로 두고두고 생각나게 될 것 같다. 비록 그 책은 지금 갖고 있지 않지만 아마 아빠가 써두신 편지는 버리지 않았으니 어디에 숨어서 시간을 견디고 있겠지. 시간이 흘러 내가 정말 아빠가 언급한 몇 가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이 책을 떠올려 꼭 읽어봐야겠다.

이전 08화 엄마 없는 토요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