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가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
나는 요즘 취미가 하나 있다.
회사 근처에서 점심시간에 할만한 비싸지 않은 운동을 찾다가 뜻하지 않게 발레를 시작했는데, 한번 시작하면 (역시나 별 뜻 없이) 그냥 계속하는 편이라 2년 차에 접어들었다.
본업은 아들 둘 엄마, 주업은 직장인이다 보니 취미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적다. 여태 첫째가 열 살이 넘을 때까지는 변변한 취미 하나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취미라고 소개하는 발레도 사실상 2주에 한번 정도 점심시간을 쪼개는 정도의 빈도밖에 안 된다. 그렇지만 내게는 엄연한, 그리고 소중한 취미가 맞다.
정신없이 오전에 일을 하다가 점심시간에 맞춰 발레 스튜디오에 가면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발레스튜디오의 예쁜 인테리어도 한몫하고, 그리고 다른 운동과는 달리 발레를 위한 의상을 갖춰 입는 것만으로도 큰 기분 전환이 된다.
발레복을 갖춰 입으려면 먼저 옅은 분홍색의 타이즈를 먼저 신고, 그 위에 수영복처럼 생긴 레오타드를 입고, 그 위에 쉬폰 감으로 된 랩스커트를 두르게 된다. 물론 마무리는 내 발에 꼭 맞는 분홍색 토슈즈다.
레오타드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 수영복처럼 생기고 감만 탄력이 있는 스판면 재질인 옷이라서 위의 속옷을 모두 탈의하고 입게 된다. 처음엔 수영장도 아닌데 속옷을 탈의한다는 게 매우 이상하고 좀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이제는 망설임 없이 시원함을 즐기며 오히려 수업하는 한 시간 동안의 해방감을 즐긴다.
- 발레를 내가 잘할쏘냐?
당연히 잘 못한다.
2년 차라고는 하지만 번히 수업이 있는 날이라도 점심을 제대로 챙겨 먹고 싶은 날이면 땡땡이를 칠 수밖에 없다. 또 수업 가야 되는 날 팀장님이나 상무님이 점심을 급 먹자고 하신다? 그럼 또 땡땡이다. 팀점 날짜를 잡으려는데 다들 내 발레 시간만 된다고 한다? 그럼 그냥 땡땡이… 이기 때문에 사실상 발레 실력이 늘 리 만무한 것이다.
그렇지만,
서툰 발레라도 나에게 큰 활력을 준다.
- 발레를 하러 스튜디오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보고서를 잘 써야 되는 ‘배 대리’가 아니고,
발레 실력이 좀 부족한 ‘배 발레리나’가 되기 때문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공간에 쏟아지고
내 앞에는 책에서만 봤던 발레리나가 있다.
얼굴도 조막만 하고 목은 사슴처럼 우아하게 길고
하나 둘 셋넷을 외치는 나의 발레 선생님은
목소리마저 아름답다.
내가 하는 너무나 간단한 포인 플렉스
스트레칭 운동을 할 때도
아름다우면서도 힘 있는 피아노 발레음악이
배경으로 깔린다.
내가 10분 전까지 속세 사무실이란 곳에서
분노의 키보드를 두들겼다는 것이
거짓말 같다.
그저 난 쭉 발레리나였고
지금도 발레리나고
영원히 발레리나인 것만 같은 느낌적 느낌이다.
그러나 어디선가 날아드는
아름다운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
“지연님 봉산탈춤 아니세요!!!!!!!!!!!!!”
그렇다.
선생님은 분명 시손느-파세 를 하랬고
내 느낌은 한 마리 새처럼
시손느-파세를 하며 나아가는 줄 알았는데..
어김없는 봉산탈춤이었던 것이다.
괜찮다. 나는 부끄럽지 않다.
나는 2주에 한번 1시간만 발레리나니까…
발레리나로서의 시간은
그저 발레리나라는 상태만으로 내게 행복을 주니
발레를 좀 못하는 발레리나라도
행복하다.
거울을 자세히 보게 되는 불상사가 있어도
이내 극복해 낼 수 있다.
대충 보면 하늘하늘 쉬폰 랩스커트에
까만 레오타드를 입은 나의 실루엣이
그럴싸해서 괜찮은데
실수로 그만 몇 겹으로 접혀있는
내 복부를 목격해 버리는 몇 초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눈을 질끈 감으면 된다.
일 못하는 배대리도 아니고,
뱃살 좀 접히는 배발레리나
뭐 어떤데.
본 업에서 내 노력이나 능력이 폄하당하거나
혹은 내가 해야 할 일을 실수를 해서 잘 못했을 때
그 자괴감은 크다.
더욱 잘 해내려고 노력을 많이 기울이기에
실패가 잦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든 실제가 아니든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경우가 있다면 그때는
내 기분이 바닥을 친다.
그렇지만 본업이 아닌 취미에서는
속상할 일이 없다.
못해도 어후 이 정도면 너무 잘한 거지
누가 뭐래도 하하 그랬네
친구들 앞에서 시손느-파세 점프를 보여줬더니
배지! 완전 발레리‘노’ 같은데???
라고 가감 없는 평가를 들어도
그저 웃겨 죽을 뿐이다.
잘하든 못하든 그냥 발레를
‘한다는’ 사실만으로 족하니까.
부담 없는 생각할 수 있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삶이 좀 더 즐겁고 편안하다.
꼭 해야 되는 것 말고도 그 외에
안 해도 되는 일도 하면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
생각보다 되게 괜찮다.
사람이 다 잘할 수는 없잖아?
- 이것이 내가 뻔뻔하게 자주 쓰는 말이다.
물론 나는 어제도 예약해 둔
발레 수업을 밥 먹고 싶어서 땡땡이쳤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