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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 Apr 02. 2024

죽음의 법 공부, 로스쿨

솔직히 경영학과로 대학 학부를 전공한 사람이면 알 것이다.


대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한다? 안 한다? 진정한 경영학과생이라면 '안 한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요즘은 취업준비를 1학년 때부터 한다는 말도 있어서 트렌드가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04학번이었던 라떼는, 경영학과면 정말 공부를 거의 안 했다. 계속 놀고 학교 행사, 동아리 활동, 연애만 열심히 했지 '학문'에 대한 학습은 거의 없었다. 경영학이라는 것 자체도 마케팅, 재무, 회계, 인사, 경영통계 라봤자 시험 때 잠시 전공서적을 빠르게 넘기며 이해하면 되었고 오픈북 테스트도 많아서 공부는 반짝 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법학은 달랐다.

우선 단어, 개념부터 생소하고 객관식이 아니고 자꾸 엄청 큰 빈종이를 여러 장 주면서 여기에 답을 적으라고 한다. 네...? 답을 고르는 게 아니고요...? 


사시 경험은커녕 법서도 한번 들춰보지 않은 채 입학했던 나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책도 기본적으로 두께가 한 권에 9~ 15cm씩 되고 커버도 두꺼운 양장본에 과목도 한두 개가 아니고 엄청 많았다. 민법이라고 하면 민법 한 개가 아니고 민법 (총론, 각론) 민사소송법 상, 하 가 따라왔고 그런 건 형법-형사소송법, 헌법-헌법소송법도 마찬가지고 머리 털나고 들어본 적 없는 법은 또 왜 이리 많은지 행정법, 형사특별법, 국제사법, 환경법.... 정말 일단 하루 수업을 위한 책이 가방에 다 안 들어간다는 사실부터 황당했다.




"누나, 지금 거기를 보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도서관에서 뭐가 뭔지 모르고 피폐하게 잡히는 대로 책을 보고 있으면 법대를 졸업하자마자 로스쿨에 온 똘똘이 남자아이들이 친절하게 도와준다. 사실상 로스쿨 동기로 같은 날 입학하고 들어왔지만, 법에 대한 실력차이는 나도 한참, 아니 너무 차이가 많이 났다. 나는 갓 태어난 아이가 걸음마를 떼려고 하는 수준이라고 한다면 이미 법대를 졸업하고 사시를 보다가 온 동기들은 마라톤 풀코스를 이미 뛰어본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 동기들 눈에 내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누님, 외우시는 겁니다. 학판검 학판검"

"야 학판검이 뭐니 ㅠㅠ"


학판검이란, 학설-판례-검토 를 줄인말이었다. 법과목들의 답안지는 대부분 A4용지를 가로로 놓고 위아래로 붙인 정도 크기에 밑줄만 빼곡히 있는 빈종이들이다. 문제도 한 바닥이다. 형법 문제를 간단히 대충 예를 들어본다면, 모월 모시에 김갑동이 무슨 아파트 몇 호에 절도를 하려고 들어가려다 창문에 얼굴을 넣었다가 으악 소리가 나는 바람에 그냥 돌아 나왔다. 그때 같이 공모하고 있던 박을동은 절도에 성공한 줄 알고 장물을 나누어 가지려고 김갑동 쪽으로 갔다. 이런 사안을 주고 이때의 각자의 범죄에 대해서 학설-판례-검토의 순으로 내가 사안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 법학 시험에 대한 답안 작성인 것이었다.


[답안 예시]

I. 사안의 쟁점

본 사안은 김갑동의 절도 미수 및 주거침입 기수 여부가 문제시되며, 박을동의 공모공동정범의 성립여부가 문제시된다.

2. 학설

~ 김갑동의 주거침입 성립 여부에 대해 학설은 1) 무슨설 2) 무슨설로 나뉘는 바, 다수설은 ~ 하다는 점에서 1) 입장을 취하고 있다.

3. 판례

판례는 ~하다는 점에서 ~로 보아 00으로 보고 있다.

4. 검토

본 사안의 경우, 김갑동은 비록 절도는 미수에 그쳤으나 주거침입은 얼굴이 창 안으로 물리적으로 들어간 이상 판례에 따라 기수로 본다는 입장이 타당한바, 주거침입은 기수로 봄이 마땅하다. 박을동의 경우에는....


지금은 형법을 자주 보지도 않아서 기억도 가물가물해서 거의 지어쓰다시피 해서 작성한 답안 예시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과목에 대해서 펜을 준비해서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야 하는 것이 법학 과목의 시험 보는 방식이다.






기존에 시험이라고는 객관식 위주로, 그리고 계산기를 두들기며 숫자 계산을 많이 했었는데 이런 방식의 시험은 정말 처음에는 적응하기도 어려웠다. 우선 내용을 차치하고라도, 손에 쥐가 나서 펜으로 그 많은 양을 짧은 시간 내에 써 내려가는 거 자체가 어려웠다. 자연스럽게 나도 법대생 친구들처럼 틈만 나면 나에게 맞는 필기구를 찾는데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되었다. 취향이 까다로운 편은 아니라서 주로 많이들 쓰는 제트스트림 0.5가 제격이었다. 한번 만난 내 맘에 드는 필기구는 또 사러 오기 시간이 아깝기 때문에 쟁여두게 된다.


책에 밑줄을 긋는 것도 과거의 나는 그냥 대강 연필로 자 없이 그었었다면, 법학 전공 서적에는 얇아서 낭창낭창한 그런 자를 조심스레 대고 샤프로 줄을 긋는 습관이 들게 되었다. 왜냐하면 두꺼운 책을 2-3 회독이라도 다시 읽으려면, 모든 부분을 다시 읽을 수 없기 때문에 중요 부분만 신중하게 줄을 잘 쳐두고 그 부분만 휙휙 다시 볼 수 있는 게 아주 중요했기 때문이다. 소설책을 보며 내 마음에 드는 부분에 느낌대로 뭉툭한 연필로 똑바르지 못한 줄을 죽죽 긋던 때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과거에는 재벌이 맘에 드는 것에 돈 쓰듯 흥청망청 책을 읽었다면 로스쿨생은 가난뱅이가 목숨을 걸고 한 땀 한 땀 삯바느질 하듯 그렇게 책을 읽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로스쿨 동기들은 정말 똑똑하기도 하지만 마음도 따스한 인간들이 많아서 법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같았던 나를 많이들 챙겨주었다. 수업이 너무 빨라 필기를 다 채 못하면 언제든지 언니! 이거 봐요! 하면서 잘생긴 글씨도 잘도 해둔 필기를 (자주) 보여주기도 하고, 첨단 노트북으로 필기와 녹음을 겸해서 기록해 둔 파일을 내게 보내주기도 하고, 법대생이 아니라서 알 수 없는 그런 법대시절의 족보 기출문제를 누나, 이거부터 한번 풀어보셔야 합니다 하면서 어리바리한 나에게 들이밀어주기도 했다. 그렇게 겨우 겨우 로스쿨에 적응을 해가면서 시험 전날이면 밤을 꼴딱 꼴딱 도서관에서 새면서, 정말 고등학교 때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를 해가며 서서히 적응을 해 나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나는 로스쿨 동기들이 아니었더라면, 과연 로스쿨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러던 중 영국 Oxford 대학에서 개최하는 모의 법정대회에 함께 나가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어렸을 때 미국에 살다왔어서 영어로 말이야 잘할 수 있지만, 그런데 그렇다고 내가 Oxford 대학에 가서 모의 법정대회를 할 수 있을까?


옥스퍼드라니. 설렘반, 두려움 반의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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