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는 크지만 애교가 많던 막둥이 동생이 장가를 간다는 사실에 기분이 이상했다. 마냥 어리던 남동생 같은데 이제 한 집안의 남편이 되고 몇 년 후면 아빠도 된다니.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하는 마음이었다.
무슨 선물을 해주면 좋을까 고민하는 중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누나, 축가 좀 부탁할 수 있을까?"
아니 축가라고!
"나도 누나 결혼식 때 내가 축가 불렀었잖아~ 이번엔 누나가 내 결혼식에 해주면 좋을 거 같아서"
그렇다.
십여 년 전 내가 꽃다운 26살에 결혼을 하던 날, 대학생이던 내 동생이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을 불러주었었다. 슈퍼스타 k 예선도 나가보고 했던 내 동생은 노래를 정말 잘 불렀다. 내 주위에서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사람이 내 동생이었기 때문에 부탁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래! 그럼 내가 준비해 볼게!"
화끈하게 대답부터 동생에게 날렸다.
친구들 결혼식에 축가도 몇 번 해봤기도 하고
그래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워킹맘의 시계는 정말 빨리 간다.
부탁받은 지 시간은 이미 몇 주 흘렀는데
주중엔 회사 가고 주말엔 밀린 볼일 좀 보면
일주일 단위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결혼식은 3주밖에 안 남았는데
아직 선곡도 못했다니 마음이 급해졌다.
동생 결혼식의 혼주인 엄마도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너 축가는 골랐니? 묻는 말에 아니 아직 노래도 못 정해서 큰일이네..라고 대답을 하니까 엄마는 나에게 이 노래를 부르면 어떻겠냐며 유튜브 링크를 보내준다.
'아니 내가 처음 들어보는 노랜데 이걸 언제 외우고 있어, 원래 아는 노래로 해야지!'
'아니야 이 노래가 니 목소리랑 진짜 잘 어울려서 딱이야 어렵지도 않으니까 좀만 연습하면 될 것 같아!'
엄마는 내가 모르는 노래를 강력 추천하며 이걸로 하면 되겠다고 자꾸 권했다. 엄마... 나 모르는 노래를 연습할 시간은 없다구요.. 살려줘유!!!
겨우 엄마를 진정시켜서 설득한 끝에 내가 이미 잘 아는 노래인 lover's concerto로 곡을 정하고 바삐 연습을 시작했다. 결혼식이 얼마 안 남았지만 나는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여전히 아들 둘이 있는 워킹맘이라 시간이 별로 없었다. 출퇴근길 차 안에서나 13층이었던 우리 집 엘리베이터 점검으로 계단을 올라가야 할 때 가쁜 숨을 내쉬며 속삭이듯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퇴근길에 엄마집에 가지러 가야 할 물건이 있어서 잠시 들렀던 어느 날 저녁, 엄마가 나에게 축가 한번 불러보라고 살살 꼬셔서 별생각 없이 노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의 노래 고문이 시작되었다.
"방금 그 부분을 좀 다시 불러볼까?"
"2절 시작하는 부분은 좀 대충 부르는 느낌이네?"
"목소리를 동그랗게 해서!"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같은 노래를 열 번쯤 부르게 되었고 내가 혹시 아이돌 연습생이었던 건가 여기 혹시 하이브인가요 나는 어디.. 여긴 누구.. 정신이 몽롱한 지경에 이르렀다.
"아 이제 그만 부를.."
"요 부분만 좀 다시 불러봐 봐 너무 잘하고 요기 딱 발음만 좀 다시 하면서 불러보면 될 거 같아 얼른!"
" 아? 아 엉.. How~ gentle is the rain..."
나도 모르게 한번 더 힘주어 열창 후, 마지막이라며 딱 한 번만 더 불러보라고 할 것 같은 엄마의 표정을 간파하고 이번에는 선방을 날렸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과 갈라지는 목소리로)
"어.. 엄마.. 나 내일 출근도 해야 되고.. 애들 가서 밥도 줘야 되는데.."
"어후 그래 너무 고생했다 너는 어쩜 이렇게 팝송을 부르면 목소리에 윤기가 챠르르~ 나서 너무 듣기 좋게 들리는지 몰라!
휴.
엄마의 칭찬라이팅 기술로 촘촘히 엮인 노래 고문에서 마침내 나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가 싸준 겉절이를 들고 집에 가서 맛있는 저녁을 무사히 먹었다.
다행스럽게도 동생의 결혼식에서 나는 실수 없이 후회 없이 축가를 잘 마쳤고 그 축가 영상은 동생네 결혼식 영상 중의 일부로 박제되어서 요즘도 가끔 동생네 놀러 가면 흘러나오곤 한다.
엄마의 노래고문이 없었어도 축가는 잘 마칠 수도 있었겠지만 이토록 자신감을 가지고 여유 있게 하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사실 살면서 엄마의 칭찬라이팅은 나를 늘 격려하고 나를 키워주었다.
나이가 40이 가까워오는 지금도 회사에서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퇴근길에 퇴사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푸념을 하면
'아니 완전 너가 맞지~ 그 사람은 왜 그런다니? 근데 너 앉은자리가 꽃방석이야~^^'
라며 미묘하게 시원한 격려와 칭찬라이팅으로 퇴사 욕구를 날려준다.
로스쿨에 도전했다가 첫 해 실패 했을 때도 솔직히 그냥 직장도 적당히 마음에 들고 재도전을 고민하는 시점에도,
(살짝 풀 죽은 목소리로)
'아니 우리 딸이 나는 변호사 되는 줄 알았는데..'
생전 내 평생 나에게 풀 죽은 목소리는 들려준 적 없는 엄마 목소리는 나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줬고 덕분에 지금도 변호사로서 일을 잘하고 있다.
유치하지만 끊임없는 칭찬으로, 하다 못해 밥 먹다가 오 이거 맛있는데? 한마디를 해도 캬 우리 딸은 미각이 대박이다 어쩜 미식가라고 칭찬하는 통에 나는 지금도 맛있는 걸 먹을 때마다 내가 미식가라는 사실을 흔들림 없이 믿고 있다. (사실상 웬만하면 저렴한 돼지국밥도 너무 맛있는 내입이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