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지 Nov 13. 2023

엄마의 노래 고문

그녀가 하는 칭찬라이팅의 대단한 힘


때는 남동생의 작년 결혼식을 앞둔 시점이었다.


덩치는 크지만 애교가 많던 막둥이 동생이 장가를 간다는 사실에 기분이 이상했다. 마냥 어리던 남동생 같은데 이제 한 집안의 남편이 되고 몇 년 후면 아빠도 된다니.


진심으로 축하하고 축복하는 마음이었다.


무슨 선물을 해주면 좋을까 고민하는 중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누나, 축가 좀 부탁할 수 있을까?"


아니 축가라고!


"나도 누나 결혼식 때 내가 축가 불렀었잖아~ 이번엔 누나가 내 결혼식에 해주면 좋을 거 같아서"


그렇다.


십여 년 전 내가 꽃다운 26살에 결혼을 하던 날, 대학생이던 내 동생이 한동준의 사랑의 서약을 불러주었었다. 슈퍼스타 k 예선도 나가보고 했던 내 동생은 노래를 정말 잘 불렀다. 내 주위에서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사람이 내 동생이었기 때문에 부탁했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래! 그럼 내가 준비해 볼게!"


화끈하게 대답부터 동생에게 날렸다.

친구들 결혼식에 축가도 몇 번 해봤기도 하고

그래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워킹맘의 시계는 정말 빨리 간다.

부탁받은 지 시간은 이미 몇 주 흘렀는데

주중엔 회사 가고 주말엔 밀린 볼일 좀 보면

일주일 단위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결혼식은 3주밖에 안 남았는데

아직 선곡도 못했다니 마음이 급해졌다.


동생 결혼식의 혼주인 엄마도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너 축가는 골랐니? 묻는 말에 아니 아직 노래도 못 정해서 큰일이네..라고 대답을 하니까 엄마는 나에게 이 노래를 부르면 어떻겠냐며 유튜브 링크를 보내준다.


'아니 내가 처음 들어보는 노랜데 이걸 언제 외우고 있어, 원래 아는 노래로 해야지!'


'아니야 이 노래가 니 목소리랑 진짜 잘 어울려서 딱이야 어렵지도 않으니까 좀만 연습하면 될 것 같아!'


엄마는 내가 모르는 노래를 강력 추천하며 이걸로 하면 되겠다고 자꾸 권했다. 엄마... 나 모르는 노래를 연습할 시간은 없다구요.. 살려줘유!!!




겨우 마를 진정시켜서 설득한 끝에 가 이미 잘 아는 노래인 lover's concerto로 곡을 정하고 바삐 연습을 시작했다. 혼식이 얼마 안 남았지만 나는 여전히 회사를 다니고 여전히 아들 둘이 있는 워킹맘이라 시간이 별로 없었다. 출퇴근길 차 안에서나 13층이었던 우리 집 엘리베이터 점검으로 계단을 올라가야 할 때 가쁜 숨을 내쉬며 속삭이듯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퇴근길에 엄마집에 가지러 가야 할 물건이 있어서 잠시 들렀던 어느 날 저녁, 엄마가 나에게 축가 한번 불러보라고 살살 꼬셔서 별생각 없이 노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의 노래 고문이 시작되었다.


"방금 그 부분을 좀 다시 불러볼까?"


"2절 시작하는 부분은 좀 대충 부르는 느낌이네?"


"목소리를 동그랗게 해서!"



어느새 나는 나도 모르게 같은 노래를 열 번쯤 부르게 되었고 내가 혹시 아이돌 연습생이었던 건가 여기 혹시 하이브인가요 나는 어디.. 여긴 누구.. 정신이 몽롱한 지경에 이르렀다.


"아 이제 그만 부를.."


"요 부분만 좀 다시 불러봐 봐 너무 잘하고 요기 딱 발음만 좀 다시 하면서 불러보면 될 거 같아 얼른!"


" 아? 아 엉.. How~ gentle is the rain..."


나도 모르게 한번 더 힘주어 열창 후, 마지막이라며 딱 한 번만 더 불러보라고 할 것 같은 엄마의 표정을 간파하고 이번에는 선방을 날렸다. (최대한 불쌍한 표정과 갈라지는 목소리로)


"어.. 엄마.. 나 내일 출근도 해야 되고.. 애들 가서 밥도 줘야 되는데.."


"어후 그래 너무 고생했다 너는 어쩜 이렇게 팝송을 부르면 목소리에 윤기가 챠르르~ 나서 너무 듣기 좋게 들리는지 몰라!


휴.


엄마의 칭찬라이팅 기술로 촘촘히 엮인 노래 고문에서 마침내 나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엄마가 싸준 겉절이를 들고 집에 가서 맛있는 저녁을 무사히 먹었다.




다행스럽게도 동생의 결혼식에서 나는 실수 없이 후회 없이 축가를 잘 마쳤고 그 축가 영상은 동생네 결혼식 영상 중의 일부로 박제되어서 요즘도 가끔 동생네 놀러 가면 흘러나오곤 한다.


엄마의 노래고문이 없었어도 축가는 잘 마칠 수도 있었겠지만 이토록 자신감을 가지고 여유 있게 하기는 어려웠을지 모른다.


사실 살면서 엄마의 칭찬라이팅은 나를 늘 격려하고 나를 키워주었다.



 나이가 40이 가까워오는 지금도 회사에서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퇴근길에 퇴사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푸념을 하면


 '아니 완전 너가 맞지~ 그 사람은 왜 그런다니? 근데 너 앉은자리가 꽃방석이야~^^'


라며 미묘하게 시원한 격려와 칭찬라이팅으로 퇴사 욕구를 날려준다.


로스쿨에 도전했다가 첫 해 실패 했을 때도 솔직히 그냥 장도 적당히 마음에 들고 재도전을 고민하는 시점에도,


(살짝 풀 죽은 목소리로)

'아니 우리 딸이 나는 변호사 되는 줄 알았는데..'


생전 내 평생 나에게 풀 죽은 목소리는 들려준 적 없는 엄마 목소리는 나의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줬고 덕분에 지금도 변호사로서 일을 잘하고 있다.


유치하지만 끊임없는 칭찬으로, 하다 못해 밥 먹다가 오 이거 맛있는데? 한마디를 해도 캬 우리 딸은 미각이 대박이다 어쩜 미식가라고 칭찬하는 통에 나는 지금도 맛있는 걸 먹을 때마다 내가 미식가라는 사실을 흔들림 없이 믿고 있다. (사실상 웬만하면 저렴한 돼지국밥도 너무 맛있는 내입이건만..)



엄마의 칭찬라이팅 덕에 나는 오늘도 힘이 난다.




매거진의 이전글 요즘 워킹맘의 장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