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떴다. 습관처럼 네이버 뉴스를 엄지로 찾아본다. 그런데 새로운 종류의 행성이 발견되었고 그것이 전속력을 다해 지구로 돌진하고 있는 것이 관측되었고, 7일 후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뉴스로 도배된 것을 보게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떤 하루를 보내게 될까.
일단 현실적 그리고 즉각적으로는 황망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을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너무 열심히 살지 말걸. 내가 만 35세 꽃띠에 삶을 마감할 줄 알았더라면 20대 아름다웠던 시절을 로스쿨 도서관에 처박혀 밤새며 공부했던 몇 년이 너무나 아까워서 배가 좀 아플 것 같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눈물 한 두 방울 흘려준 뒤, 침실에서 털고 나오겠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연락을 하겠다. 첫 번째는 우리 회사 인사팀장님께 “부장님~ 저 퇴사해요~ 건강하세요!” 전화 한 통 올리겠다. 사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이런 연락을 하느라 인사팀장님 전화는 계속 불통 일지 모른다. 아니면 팀장님 전화가 애초에 꺼져있을 수도 있다. 모든 이의 삶이 1주일 남은 마당에 사실 우리 회사 원 사장님부터 자유의 몸이 되기로 결심하셨을 수도 있다. (사장님 픽션은 픽션일 뿐 오해하시면 아니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남편에게 카톡으로 통보하겠다."우리 이혼해"
본래 성품이 착하고 마음이 보드라우며 평소 정신적으로 상당히 나에게 의지하는 만 41 짤 남편의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울면서 전화가 올 것 같다. 여보~!! 이게 무슨 말이야! 지금 1주일밖에 시간이 없는데 우리 꼭 붙어서 껴안고 있어야 하는데 뭔 헛소리 하고 난리야~!
그럼 나는 멋있는 목소리로 다시 답하겠다. 우린 오늘부터 돌싱이야. 나랑 연애할래? 하.. 정말 이 말은 내가 지금 키보드로 글을 치면서도 너무 오글거려서 한 번에 다 못 치고 손으로 자꾸만 입을 틀어막을 지경이지만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3년 반을 연애하는 동안 단 한 번을 싸워보지 않고 결혼했지만 결혼생활 10년 동안은 정말 불처럼 싸웠다. 정말 속상하고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이혼하자’는 말은 단 한 번을 못 해봤다. 알토란 같은 두 아들들이 있는 이상 아이들과 생물학적 DNA가 같은 이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운명공동체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살날이 딱 일주일밖에 없다면 이미 내 운명이 다한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초기화해서 시작할 일이다. 서로의 방구 소리에 깜짝 놀라며 등 긁어주던, 목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하품하던, 그런 여보 말고 유튜브에 나오는 BTS 정국이처럼 미소 하나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그런 여보를, 처음 만났던 2008년 1월의 마음으로 남은 일주일을 바라보겠다. 참 이상한 일이다. 끝이 멀다고 생각하면 무디게 다가왔던 것들이 끝이 가까이에 왔다고 하면 더없이 소중해진다.
자 이제 회사도 안 가도 되겠다, 곤히 잠들어있는 애들은 깨울까 말까 망설여진다. 원래도 어여쁜 아들들이지만 잘 때는 더 예쁘다. 꼭 천사 같다.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서 새큼한 입 냄새를 폭폭 풍기며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할 때도 사랑스럽다. 그러나 오전에 정신없이 학교로 유치원으로 헤어진 다음에 각자의 삶을 살다가 2-3시쯤 만날 때는 그 반가움과 버무려진 사랑스러움이 한도를 초과해서 막 만나자마자 입술을 내밀고 볼때기를 죽죽 빨아먹고 싶다.
일주일 후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의 개인적인 선택이라면 아이들도 그들만의 삶이 있으니 학교랑 유치원을 일단 보내고 싶다. (절대 내가 그 와중에도 하루 반나절 정도는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나도 오늘 아침 회사를 그만둔 마당에 학교나 유치원 선생님들도 안 나오실 테니 보낼 수가 없겠지. 게다가 평소 같으면 내가 회사 출근하기 전에 우리 집으로 출근을 해서 집안 살림을 도와주시던 이모님도 당연히 안 오실 테니 나의 살림 실력을 강제로 발휘해야 하겠다. 그렇다. 나는 당장 일주일 후에 지구가 멸망하기 때문에 12년 넘게 다닌 회사를 하루아침에 관둬버렸다 하더라도 어김없이 아침부터 가사노동자로서의 지위는 벗어날 수가 없는 집 요정 도비였던 것이다. 나의 노동자로서의 지위에 대한 푸념은 시간도 없는데 접어두고 나의 하루를 어떤 즐거운 일로 채워볼까 고민을 해야 한다.
먼저 아침식사는 그동안 간헐적 단식을 하느라 안 먹었었는데 오늘은 다르다. 남은 일주일 동안 먹을 수 있는 끼니가 몇 끼 없으니 아침은 무조건 먹어야겠다. 3x7=21. 오직 21번의 끼니만 남아있으니 한 끼 한 끼가 너무나 소중하다. 두 아이가 사랑하는 팬케익을 굽고 뜨거울 때 버터를 올리고 메이플 시럽을 아주 듬뿍 뿌려먹겠다. 점심에는 평소 눈여겨봐 둔 잭슨 피자를 시켜먹어야지. (모두가 일을 관둬서 배달음식이나 외식이 안된다는 가정은 너무나 적막하여 삶의 이유가 저해될 지경이니 되는 걸로 가정) 저녁에는 무조건 스시 오마카세를 먹어야겠다. 일주일 안에 꼭 랍스터 뷔페도 가고 남산타워에서 360도 돌아가는 식당도 꼭 한번 가고 밍글스 같은 파인 다이닝도 한 번쯤 꼭 가고 싶다. 엄청 더 고급진 못 가본 식당도 많지만 그냥 내 30여 년 인생에서 가본 맛있었던 곳을 한두 군데 정도 다시 가보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왜냐하면 소중한 내 일주일을 안정적으로 실패 없이 행복하게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아 참, 젤라또 아이스크림 한 컵에 무려 7천 원씩이나 해서 한 번에 한 컵 밖에 못 먹었던 젠제로 아이스크림집에도 가서 맛 별로 한 컵씩 다 주문해서 한입씩 다 찍어먹는 아이스크림 플렉스도 꼭 해야겠다.
먹는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을 못 차려서 지구가 일주일 후에 망한다고 하는데 먹고 싶은 것만 나열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저장 목록에 가보고 싶은 예쁜 까페, 멋진 바다 뷰 숙소, 미니멀하게 아름다운 인테리어가 한가득 뒤죽박죽 섞여있는데 막상 삶이 1주일 남았다고 하니까 조급한 마음에 머릿속도 점점 뒤죽박죽이 되어간다. 시간 나면 꼭 가야지 하고 저장버튼들을 눌러 댔지만 막상 이제 갈 시간이 있다고 해도 별로 가고 싶지 않아 진다.
조용히 앉아서 내 마음속을 다시 들여다보니 그저 날씨 좋은 날 자주 가던 양재 시민의 숲에 텐트를 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캠핑 의자에 앉아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고 싶다. 틈만 나면 그저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고 보지 못했던 아이들의 얼굴을 한번 더 마주하고 싶다. 어릴 때는 뛰어노는 것이 최고라는 마음에 영어유치원을 안 보냈지만 이제 와서는 조바심이 나서 매일 밤 동네에 괜찮은 영어학원 정보를 알아보느라고. 또 나중에 아들들 장가보낼 때 변변치 않은 신혼집이라도 하나씩 얻어주려면 지금부터 어떻게 자산을 불리나 생각에 그저 눈 빠지게 부동산까페 정보 알아보느라고. 모래알처럼 허비했던 시간들이 너무나 아깝다. 엄마 이것 좀 봐! 신나게 종이비행기를 날릴 때 진심으로 같이 신나는 시간을 보낼 걸. 엄마 윤우 쩜프하는것좀 봐! 혀 짧은 소리할 때 건성으로 그래 그래 대답하지 말고 늘 진심으로 봐줄 걸.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렇게 후회하기에도 아까운 내 시간. 지금이라도 소중한 시간을 보내자. 아이들과 즐겁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겠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도 그 일주일 안에 꼭 배정하고 싶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 뒤에 많은 가치들이 ‘가족’에게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나를 고등학교 시절 그때처럼 온전한 ‘나’로 바라봐주는 친구들은 내게 커다란 기쁨들이다. 일주일 뒤에 지구는 멸망하겠지만 나는 내 분신 같은 친구 두 명을 만나서 대학교 때 유럽으로 함께 떠갔던 배낭여행 이야기를 다시 꺼내서 깔깔대고 웃겠다. 20번도 더 한 이야기이지만 언제나 그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다. 따뜻한 화덕 피자를 차가운 화이트 와인과 함께 먹고 마시며 친구들과 저녁시간을 보내면 지구가 멸망한다는 일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테지. 나와 친구가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무척이나 사랑한다고 절친들에게 부끄럽고 오글거리지만 또 고백할 테다.
마지막으로 또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결혼으로 얻어진 보너스 부모님들과도 한나절 풍요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틈만 나면 손주까지 봐줘서 너무 고맙다고. 늘 사랑한다고 또 고백을… (나는야 프로 고백러)
지구가 일주일 후에 멸망한다고 생각을 하다 보니 지금 대낮인데 아주 감성은 새벽 3:30 정도로 흐르고 있다. 사실 이 세상에 오는 데는 순서 있지만 가는 데는 순서 없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지구가 1주일 후에 멸망할 확률은 크지 않겠지만 사실 내 인생에서 내가 어떠한 사유로든 세상을 떠날 일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있어 지구가 멸망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나라는 우주에 내가 없으면 그 세상은 끝나는 것이니까.
어차피 지구가 곧 멸망한다고 한들 나는 여느 주말과 같은 하루를 보내며 놓친 일에 대해 후회하며 또 현재를 최대한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며 적당히 행복한 하루를 보낼 것이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에 두려워 떨 필요는 없지만 언젠가는 또 내게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가끔씩 생각해 준다면 사랑하는 남편에게 소리 한번 덜 지르고, 핸드폰 대신 아들들의 예쁜 얼굴을 한번 더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보낼 것 같아서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나는 무병장수로 100세 정도까지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지구 멸망은 내 생애 보지 않고 그저 행복하게 잘 먹고살다가 가고 싶다. 이것으로 나의 가상의 하루에 대한 생각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