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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 Nov 01. 2021

만일 일주일 후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만일 일주일 후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아침에 눈을 떴다. 습관처럼 네이버 뉴스를 엄지로 찾아본다. 그런데 새로운 종류의 행성이 발견되었고 그것이 전속력을 다해 지구로 돌진하고 있는 것이 관측되었고, 7일 후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뉴스로 도배된 것을 보게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떤 하루를 보내게 될까.




일단 현실적 그리고 즉각적으로는 황망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을 것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너무 열심히 살지 말걸. 내가 만 35세 꽃띠에 삶을 마감할 줄 알았더라면 20대 아름다웠던 시절을 로스쿨 도서관에 처박혀 밤새며 공부했던 몇 년이 너무나 아까워서 배가 좀 아플 것 같다. 아픈 배를 부여잡고. 눈물 한 두 방울 흘려준 뒤, 침실에서 털고 나오겠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연락을 하겠다. 첫 번째는 우리 회사 인사팀장님께 “부장님~ 저 퇴사해요~ 건강하세요!” 전화 한 통 올리겠다. 사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이런 연락을 하느라 인사팀장님 전화는 계속 불통 일지 모른다. 아니면 팀장님 전화가 애초에 꺼져있을 수도 있다. 모든 이의 삶이 1주일 남은 마당에 사실 우리 회사 원 사장님부터 자유의 몸이 되기로 결심하셨을 수도 있다. (사장님 픽션은 픽션일 뿐 오해하시면 아니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남편에게 카톡으로 통보하겠다. "우리 이혼해"

본래 성품이 착하고 마음이 보드라우며 평소 정신적으로 상당히 나에게 의지하는 만 41 짤 남편의 행동으로 미루어볼 때 울면서 전화가 올 것 같다. 여보~!! 이게 무슨 말이야! 지금 1주일밖에 시간이 없는데 우리 꼭 붙어서 껴안고 있어야 하는데 뭔 헛소리 하고 난리야~!


그럼 나는 멋있는 목소리로 다시 답하겠다. 우린 오늘부터 돌싱이야. 나랑 연애할래? 하.. 정말 이 말은 내가 지금 키보드로 글을 치면서도 너무 오글거려서 한 번에 다 못 치고 손으로 자꾸만 입을 틀어막을 지경이지만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3년 반을 연애하는 동안 단 한 번을 싸워보지 않고 결혼했지만 결혼생활 10년 동안은 정말 불처럼 싸웠다. 정말 속상하고 화가 날 때도 있었지만 ‘이혼하자’는 말은 단 한 번을 못 해봤다. 알토란 같은 두 아들들이 있는 이상 아이들과 생물학적 DNA가 같은 이 남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운명공동체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살날이 딱 일주일밖에 없다면 이미 내 운명이 다한 것이고 그렇다면 우리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초기화해서 시작할 일이다. 서로의 방구 소리에 깜짝 놀라며 등 긁어주던, 목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하품하던, 그런 여보 말고 유튜브에 나오는 BTS 정국이처럼 미소 하나에 마음이 녹아내리는 그런 여보를, 처음 만났던 2008년 1월의 마음으로 남은 일주일을 바라보겠다. 참 이상한 일이다. 끝이 멀다고 생각하면 무디게 다가왔던 것들이 끝이 가까이에 왔다고 하면 더없이 소중해진다.




자 이제 회사도 안 가도 되겠다, 곤히 잠들어있는 애들은 깨울까 말까 망설여진다. 원래도 어여쁜 아들들이지만 잘 때는 더 예쁘다. 꼭 천사 같다.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서 새큼한 입 냄새를 폭폭 풍기며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할 때도 사랑스럽다. 그러나 오전에 정신없이 학교로 유치원으로 헤어진 다음에 각자의 삶을 살다가 2-3시쯤 만날 때는 그 반가움과 버무려진 사랑스러움이 한도를 초과해서 막 만나자마자 입술을 내밀고 볼때기를 죽죽 빨아먹고 싶다.


일주일 후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나의 개인적인 선택이라면 아이들도 그들만의 삶이 있으니 학교랑 유치원을 일단 보내고 싶다. (절대 내가 그 와중에도 하루 반나절 정도는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나도 오늘 아침 회사를 그만둔 마당에 학교나 유치원 선생님들도 안 나오실 테니 보낼 수가 없겠지. 게다가 평소 같으면 내가 회사 출근하기 전에 우리 집으로 출근을 해서 집안 살림을 도와주시던 이모님도 당연히 안 오실 테니 나의 살림 실력을 강제로 발휘해야 하겠다. 그렇다. 나는 당장 일주일 후에 지구가 멸망하기 때문에 12년 넘게 다닌 회사를 하루아침에 관둬버렸다 하더라도 어김없이 아침부터 가사노동자로서의 지위는 벗어날 수가 없는 집 요정 도비였던 것이다. 나의 노동자로서의 지위에 대한 푸념은 시간도 없는데 접어두고 나의 하루를 어떤 즐거운 일로 채워볼까 고민을 해야 한다.


먼저 아침식사는 그동안 간헐적 단식을 하느라 안 먹었었는데 오늘은 다르다. 남은 일주일 동안 먹을 수 있는 끼니가 몇 끼 없으니 아침은 무조건 먹어야겠다. 3x7=21. 오직 21번의 끼니만 남아있으니 한 끼 한 끼가 너무나 소중하다. 두 아이가 사랑하는 팬케익을 굽고 뜨거울 때 버터를 올리고 메이플 시럽을 아주 듬뿍 뿌려먹겠다. 점심에는 평소 눈여겨봐 둔 잭슨 피자를 시켜먹어야지. (모두가 일을 관둬서 배달음식이나 외식이 안된다는 가정은 너무나 적막하여 삶의 이유가 저해될 지경이니 되는 걸로 가정) 저녁에는 무조건 스시 오마카세를 먹어야겠다. 일주일 안에 꼭 랍스터 뷔페도 가고 남산타워에서 360도 돌아가는 식당도 꼭 한번 가고 밍글스 같은 파인 다이닝도 한 번쯤 꼭 가고 싶다. 엄청 더 고급진 못 가본 식당도 많지만 그냥 내 30여 년 인생에서 가본 맛있었던 곳을 한두 군데 정도 다시 가보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왜냐하면 소중한 내 일주일을 안정적으로 실패 없이 행복하게 채우고 싶기 때문이다. 아 참, 젤라또 아이스크림 한 컵에 무려 7천 원씩이나 해서 한 번에 한 컵 밖에 못 먹었던 젠제로 아이스크림집에도 가서 맛 별로 한 컵씩 다 주문해서 한입씩 다 찍어먹는 아이스크림 플렉스도 꼭 해야겠다.


먹는 이야기만 나오면 정신을 못 차려서 지구가 일주일 후에 망한다고 하는데 먹고 싶은 것만 나열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저장 목록에 가보고 싶은 예쁜 까페, 멋진 바다 뷰 숙소, 미니멀하게 아름다운 인테리어가 한가득 뒤죽박죽 섞여있는데 막상 삶이 1주일 남았다고 하니까 조급한 마음에 머릿속도 점점 뒤죽박죽이 되어간다. 시간 나면 꼭 가야지 하고 저장버튼들을 눌러 댔지만 막상 이제 갈 시간이 있다고 해도 별로 가고 싶지 않아 진다.


조용히 앉아서 내 마음속을 다시 들여다보니 그저 날씨 좋은 날 자주 가던 양재 시민의 숲에 텐트를 치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캠핑 의자에 앉아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보고 싶다. 틈만 나면 그저 핸드폰을 들여다보느라고 보지 못했던 아이들의 얼굴을 한번 더 마주하고 싶다. 어릴 때는 뛰어노는 것이 최고라는 마음에 영어유치원을 안 보냈지만 이제 와서는 조바심이 나서 매일 밤 동네에 괜찮은 영어학원 정보를 알아보느라고. 또 나중에 아들들 장가보낼 때 변변치 않은 신혼집이라도 하나씩 얻어주려면 지금부터 어떻게 자산을 불리나 생각에 그저 눈 빠지게 부동산까페 정보 알아보느라고. 모래알처럼 허비했던 시간들이 너무나 아깝다. 엄마 이것 좀 봐! 신나게 종이비행기를 날릴 때 진심으로 같이 신나는 시간을 보낼 걸. 엄마 윤우 쩜프하는것좀 봐! 혀 짧은 소리할 때 건성으로 그래 그래 대답하지 말고 늘 진심으로 봐줄 걸.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렇게 후회하기에도 아까운 내 시간. 지금이라도 소중한 시간을 보내자. 아이들과 즐겁게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겠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도 그 일주일 안에 꼭 배정하고 싶다.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 뒤에 많은 가치들이 ‘가족’에게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나를 고등학교 시절 그때처럼 온전한 ‘나’로 바라봐주는 친구들은 내게 커다란 기쁨들이다. 일주일 뒤에 지구는 멸망하겠지만 나는 내 분신 같은 친구 두 명을 만나서 대학교 때 유럽으로 함께 떠갔던 배낭여행 이야기를 다시 꺼내서 깔깔대고 웃겠다. 20번도 더 한 이야기이지만 언제나 그것만큼 재미있는 일이 없다. 따뜻한 화덕 피자를 차가운 화이트 와인과 함께 먹고 마시며 친구들과 저녁시간을 보내면 지구가 멸망한다는 일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테지. 나와 친구가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무척이나 사랑한다고 절친들에게 부끄럽고 오글거리지만 또 고백할 테다.


마지막으로 또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결혼으로 얻어진 보너스 부모님들과도 한나절 풍요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틈만 나면 손주까지 봐줘서 너무 고맙다고. 늘 사랑한다고 또 고백을… (나는야 프로 고백러)


지구가 일주일 후에 멸망한다고 생각을 하다 보니 지금 대낮인데 아주 감성은 새벽 3:30 정도로 흐르고 있다. 사실 이 세상에 오는 데는 순서 있지만 가는 데는 순서 없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지구가 1주일 후에 멸망할 확률은 크지 않겠지만 사실 내 인생에서 내가 어떠한 사유로든 세상을 떠날 일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있어 지구가 멸망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다. 나라는 우주에 내가 없으면 그 세상은 끝나는 것이니까.


어차피 지구가 곧 멸망한다고 한들 나는 여느 주말과 같은 하루를 보내며 놓친 일에 대해 후회하며 또 현재를 최대한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며 적당히 행복한 하루를 보낼 것이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에 두려워 떨 필요는 없지만 언젠가는 또 내게 일어날 일이라는 것을 가끔씩 생각해 준다면 사랑하는 남편에게 소리 한번 덜 지르고, 핸드폰 대신 아들들의 예쁜 얼굴을 한번 더 들여다볼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보낼 것 같아서 괜찮을 것 같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나는 무병장수로 100세 정도까지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지구 멸망은 내 생애 보지 않고 그저 행복하게 잘 먹고살다가 가고 싶다. 이것으로 나의 가상의 하루에 대한 생각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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