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무엇이냐
제목부터 심오하다. 자식이란 대체 무엇인가. 내 자식, 내 새끼. 놀랍게도 이 귀여운 단어가 구어체로 읽어보면 (야 이 자식아! 새끼야!) 욕이 되는 것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자식을 생각할 때 드는 그 사랑과 한숨 양가감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한번은 내가 아들에게 생선살을 발라주고 있었다. 아들은 유독 생선 중에서 조기만 좋아한다. 조기는 고등어나 삼치와 달리 잔가시가 많아서 들어가는 수공에 비해 나오는 결실이 적다. 그런데 조기 뼈를 조심조심 발라내다 보면 약간 희열같은 게 생긴다. 살을 부스러트리지 않고 원형의 모습 그대로 발라낸 조각을 내 새끼 밥그릇 위에 척 하니 올려주면 그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별것도 아니지만 애들이 와앙 하고 크게 한 숟갈을 신나서 먹을 때면 왠지 그 순간만큼은 내가 애들에게 임금님 수라상을 차려준 기분이다.
보통은 먹는 속도가 가시 발라내는 속도보다 빠를 수 밖에 없어 발라 두는 족족 없어진다. 그런데 가끔은 다른 반찬에 잠시 정신이 팔리면 밥 숟가락 위에 조기 생선살이 수북하게 올라가는 타이밍이 생길 때가 있다. 그 수북한 생선살을 한번 보고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또 다시 생선을 정신없이 바르고 있었다. 아들이 "엄마 아~" 하더니 내 입으로 아주 커다란 양배추 쌈을 하나 싸서 쏙 넣어준다. 그 조그만 손가락으로 양배추 안에 쌈장, 콩나물, 밥 이것저것 꽁꽁 싸서 날 먹여 주다니. 고마우면서도 뿌듯하고 행복한 마음이 든다. 역시 쌈은 누가 먹여줘야 맛있네, 생각하며 우적우적 맛있게 씹었다.
그런데 아뿔싸. 방금 까지 수북했던 그 아이 밥그릇 위 생선살이 안 보인다. 이럴 수가. 나는 정말 본능적으로 화들짝 놀랐다. "너너너!너! 여기 있던 생선살 방금 엄마 준 쌈에 넣은 거야?! "
입에 쌈을 문 채 밥풀 튀겨가며 막 다급하게 따져 물었다. 내가 마치 못 먹을 것이라도 먹어버린 사람인 냥. "아니~ 그건 아까 윤우가 먹었지~"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나를 안심시켜준다.
휴. 큰일 날 뻔 했다.
아니 그런데. 큰일 날 뻔 했네? 내가 바른 생선을 내가 내 입으로 먹는게 그렇게 억울할 일인가? 내 새끼 입으로 안 들어가고, 내가 스스로 먹었을까봐 그렇게 놀라서 급하게 물어볼 일인가 이 말이다. 대체 자식이 무어길래. 본능적으로 나온 나의 반응에 내 스스로 좀 어이가 없었다.
돌이켜 생각 해보니 애초에 내가 먹을 생선이었다면 그렇게 정성껏 가시가 한 톨도 없기를 기도하는 마음처럼 바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그것보단 노력과 관심이 훨씬 덜 들어가도록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손놀림에 맡길 뿐 내 뇌를 쓰지는 않고 뚝딱 먹어 치웠을 일이다. 사랑하는 다섯 살 꼬마를 위해 특별한 노력을 들였던 그것들이 노력이 필요치 않았던 내입으로 들어오니 스스로 화들짝 놀랐나 보다.
내가 생선살을 바른다는 것은 나에게는 사랑이다. 자식에게 주고 싶은 사랑을 모으고 모았는데 사랑을 못 주게 된 것인지 슬퍼질 까봐 놀랐겠지. 또 사랑하는 마음으로 들인 내 노력이 허사로 돌아간다 싶으면 한숨 또는 화가 나는 그런 희한한 마음, 대체 뭘까.
자식이란 그 존재만으로 부모에게 기쁨을 주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물론 지금 주말 내내 헐크 같은 표정과 목소리로 두 아들들을 제압하고 오기는 했지만, 기쁨을 주는 존재인 건 확실하다. (기쁨’만’ 주는 존재라고는 안했다.) 지금보다 내 나이가 더 어릴 때는 재미있고 기쁜 것이 참 많았다. 학교에서 새롭게 배우는 행성의 이름도 재미있고 공전과 자전의 원리를 알게 되는 것도 기뻤다. 대학생 때 새로 옷을 사는 것도 기쁘고 뮤지컬 노래를 듣는 것도 즐거웠는데 이제는 일상에서 기쁨을 주는 것이 별로 없다. 회사에 처음 입사해서 받았던 그 첫 월급의 기쁨을 지금 다시 느끼려면 그 월급의 10배쯤 되는 금액의 성과급 정도 받아야 할 것 같으니 나이가 들면 들수록 기쁨이라는 놈이 비싸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식을 보며 기쁘기는 너무 쉽다. 일단 나를 보며 웃어주면 내 마음이 너무 기쁘고 환해진다. 엄마~ 라며 나를 다정하게 한번 불러주면 또 기쁘다. 해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어 주기만 해도, 아침에 일어나서 별탈 없이 뚜벅 뚜벅 학교를 향해 문을 나서주는 뒷모습만 보여줘도 자식은 내게 진한 기쁨을 준다. 자식이라는 것은 지가 특별히 들이는 노력도 없이 부모한테 기쁨을 줄 수 있는 그런 (부모 기쁨 제조 측면에서) 효율적인 존재인 것이다.
물론 자식 때문에 열 받는 일 혹은 맘 졸이는 일은 위에 나열한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방법과 무한한 경우의 수로 경험했다. 이유 없이 엉덩이 까기, 그네 타다가 팔 부러져서 오기, 눈높이와 학교 숙제 끝도 없이 미루기 등등.. 그렇지만 다 합하면 예쁜 것이 조금 더 많기는 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새해가 된다면 자식을 하나 더 들이고 싶다. 인간 자식 말고 내가 별 노력 들이지 않아도 스스로 나에게 기쁨을 줘버릴 그럴 존재를 하나 마련해서 가꾸어 나가고 싶다. 기왕이면 나도 크게 실망할 일 없는 초록 초록 키 큰 고무나무 하나 정도, 또는 저평가 되어서 수직 상승을 기다리는 비상장 벤처 주식 몇 주 입양해서 푸르른 마음으로 키워보련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출근하기 위해 아침에 강남역 대로변을 걷는 사람들의 보다 보면 모두들 얼굴에 배게 자국들이 찍힌 채 다들 어디론가 열심히 걸어간다. 목적지를 잘 몰라 헤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체는 AI처럼 부지런하고 빠른 걸음으로 자동 걷기 모드를 탑재 하고 있고 상체는 그 걸어가는 사이에서도 뭐 좀 재미있는 것이 있을까 핸드폰 작은 화면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다. 그런데 그 숨가쁜 행복 추구 속에서도 진짜 웃고 있는 사람은 별로 안보인다. 새해에는 꼭 인간이 아니라도 애정 어린 자식 하나 다들 들여서 조금이나마 미소 짓기가 더 쉬운 그런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