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씨의 불친절한 에세이
평소에 취미도 아니고, 별것도 아닌데 매우 단순한 열정이 발현되는 경우가 있다.
별 의미도 없고, 그 열정이 삶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몇 해 전에는 어쩌다 만년필의 필기감에 꽂혀서 쓸데없이 만년필을 몇 개나 샀고, 나아가 캘리그래피를 배워볼 요량으로 캘리그래피 세트까지 구매했다. 결국 포장만 뜯어보고 시작도 안 했지만.
학교 다닐 때는 필기감이 좋은 펜을 발견하면 색깔별로 구매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 펜들이 고가의 일본제품들이고, 어떤 펜은 떨어뜨리는 순간 펜이 망가지는 경우도 있어서 나의 용돈을 매우 축나게 하기도 했다.
최근에 정말 오랜만에 우연히 동료의 펜을 빌려 썼었는데, 필기감이 너무 좋아서 결국 색깔별로 구매하고 말았다. 그 펜들도 나의 용돈을 축나게 했던 그 일본회사 제품이다.
그럴 때마다, 아직까지 펜을 만드는 기술력이 일본에 뒤쳐진다는 것이 안타깝다.
우리나라 회사도 펜을 만든 역사가 꽤 오래되었건만, 아직까지 필기감만은 일본을 못 따라간다.
필기구에 대한 단순한 열정은 간혹 필통이나 다이어리, 노트에 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회사에 들고 다니는 필통과 주말에 외출할 때 가지고 다니는 필통이 따로 있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누군가가 내 필통을 본 직원 중 한 명이 이렇게 이야기했다.
“회사에 필통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나는 회사 업무 중에도 다른 사람보다 노트에 무엇인가를 많이 기록하는 사람이라 필기감이 중요하고,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펜을 항상 들고 다닌다.
필기감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가 그 펜이 쓰이는 노트다.
그래서, 나의 필기감을 배가 시켜줄 노트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은 또 고가의 노트를 구매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여 구매한 펜과, 필통과 노트의 쓰임새가 주로 회사 업무라서,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내가 제일 자주 쓰는 물건에는 돈을 아끼지 말라는 누군가의 조언에 따라, 일상에서 뭔가를 기록할 일이 가장 많은 곳인 회사에서 나의 필기감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는 없다.
그나마 지금 회사에서는 들고 다니는 펜의 개수를 좀 줄이고, 노트는 그냥 회사에 구비된 것을 쓴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는 필기감에 대한 단순한 열정은 계속되어야만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