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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hnnap Feb 06. 2024

〈매니악〉



 아득한 거인들의 삶을 하나의 연속적인 드라마로 구성한 책. 재밌게 읽었다.





149. “자네가 사는 세계를 자네가 책임질 필요는 없는 거야.”



 1부 비이성의 발견에서는 양자역학이 초기에 수용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가 뒤따랐는지 보여준다. 양자역학은 일종의 환원주의를 암시한다. 고전역학의 물리적 실체가 거의 부정되고, 양자세계는 수학적 확률의 지배를 받는다는 해석을 낳기 때문이다. 신과 구의 대립에서 파울이 손을 들어준 것은 새로운 과학이었고, 그러나 그것은 파울 자신이 일평생 서있던 땅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가 당시에 느꼈을 낭패감이 잘 예상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던 깔끔한 세상은 그 앞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2부 이성의 광기 어린 꿈에서 다루는 폰 노이만의 삶에 이 책은 가장 많이 할애돼 있다. 조니가 어떻게 내적으로 변해갔는지 살피는 흐름이 흥미롭다. 조니에 대해 섣불리 추측하자면 그가 149p처럼 말할 때에도 세상에 대해 어떠한 예감이 있었을 것 같다. 세상을 무책임한 게임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짓을 해도 근본적으로 붕괴하지 않을 거란 믿음. 역사의 흐름과 문명의 흥망성쇠 사이클에 대해 어려서부터 박식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수 있지 않을까.

 한 분야의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광기 어린 이성을 과시할 에너지를 찾으려는 듯 폰 노이만은 거대한 벽만 찾아다녔다. 그러나 괴델에 의해 그는 처음으로 무너진다. 괴델은 아몬드 나무의 곡선 같았던 반면 조니는 바빌론의 공중정원의 직선 같았다. 괴델의 불완전성정리로 힐베르트 프로젝트에 걸었던 자신의 기대가 흔들리자 그는 순수수학과 이별하다시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아내를 만나기까지 집중할 대상을 찾지 못해 불안해했다는 저자의 서술은, 많지 않은 젊은 시절 조니의 인간적인 면모의 흔적 중 하나였다.

 저자의 서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조니가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 건 매니악을 다루기 위해서였다는 인상을 받는다. 공생발생에 대해선 처음 알게 되었는데 퍽 매력적인 개념이라 느꼈다. 일종의 환원주의지 않나 싶다. 3부에서 인간의 대국 데이터를 모두 지운 A.I.가 알파제로로 거듭나 알파고를 모두 이겼다는 서술이 나온다. 이것은 역사적인 방향성이 아닌 국지적인 부분들의 집약적인 연결성이 보다 치명적일 수 있다는 암시 같았다. 이세돌이 알파고를 상대로 얻어낸 승리는 인간 역사의 극댓값이었다. 그리고 폰 노이만은 알파고의 할아버지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3부는 인공지능의 망상. 결국에 이 책은 여기로 향한다. 열여섯의 3월에 집에 왔을 때 부모님이 거실에서 알파고와 이세돌 기사의 대국을 보고 있던 풍경을 기억한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4번째 경기 후 세상의 소란과 그 승리의 의미의 온도에 심드렁하던 나를 기억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니 비로소 그 다섯 번의 대국이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졌는지 조금이나마 실감이 됐다.



 연치조차 죽음 앞에서는 연약한 영혼이었을 뿐이다. 인간의 영혼에 새겨진 궤적과 역사는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갈까?




#문학동네 #매니악 #벵하민라바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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