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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hnnap Feb 09. 2024

〈돌봄의 찻상〉


36. 하루에도 수차례 느닷없이 내리는 빗줄기마저 현재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습하고 서늘한 기온을 따뜻한 밀크티와 제법 어울리는 찻상의 멋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재밌게 읽었다. 아직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고, 차도 편의점이나 다이소에서 파는 것밖에 안 마셔봐서 낯선 고유명사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작가의 글은 맑게 다려진 차처럼 사려깊고 은은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제목처럼 self-care(자기 돌봄)에 관한 책이었다.

 차와의 인연을 담은 1장은 읽기에 즐거웠다. 아직 가스등을 켜던 시절 타지에서 홀로 유학생활을 시작하며, 작가가 어떻게 차와 친해지게 되었는지가 담겨있다. 또한 왜 찻상문화에 친밀함을 느꼈는지 어린 시절의 기억도 나란히 묻어난다. 결코 침범할 수 없는 그때의 따스한 기억은 작가가 몸 기댈 곳이 필요할 때마다 그녀에게 작고 충분한 공간을 내어주었다. 다양한 찻상의 예쁜 흑백사진을 포함하는 책의 구성과 디자인은 1장을 읽고 나면 설득될 수밖에 없다. 혼자서만 차를 마신 것은 아니지만 1장에서의 일화들은 보다 개인적이고 내적인 맥락을 함유하고 있다. 어떤 외로움은 소중히 해야 할 감정인 것이다.

 2장과 3장은 찻상을 테마로 한 작가의 여러 지역 여행들을 포함하고 있다. 지구 각지에서 다양한 차와 찻상문화, 그리고 찻상에 함께 있던 사람과 그들을 감쌌던 공간이 함께 제시되는데 매끄럽게 읽혔다. 프랑스의 아페리티프와 영국의 애프터눈티 등 차가 어떻게 지구 어딘가에서 다른 곳으로 넘어가 로컬한 문화에 흡수되었는지 역사적 배경도 틈틈이 담겨있다. 읽다보니 세이렌을 중심으로 한 커피문화가 오히려 한국에 만연해있는 것이 이상할 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개인적으로 차와 관련된 단어들은 소박하고 사소하면서도 편안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찻상, 찻잎, 다구, 티룸, 덖다 등등.

 분명히 찻상에 관한 책이지만 작가는 찻상 자체에만 고집스레 주목하지 않는다. 차가 어떻게 각 지역의 문화에 스며들었는지에 초점을 두며 애써 고정된 정의를 발견하려 하지 않는다. 덕분에 텍스트는 슴슴하고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어떻게 숱한 이방인의 생활 속에서 자신을 다르고 얼러 왔는지, 그것이 주된 흐름이다. 그러나 작가가 유학생활을 시작하던 때와 달리 타국에서도 우리는 우리말로 된 음악을 듣고 영상을 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찻상문화는 부드럽고 강력한 힘이다 생각했다. 시각, 촉각, 청각, 후각, 미각의 인간의 오감을 모두 휘어잡아서일까, 같이 마셨던 사람 때문일까, 아니면 그때의 나 때문일까.

  지난학기 나는 차를 통해 오롯이 현재에 머무르기 위한 호흡은 마련하지 못했다. 명상을 배웠음에도 필요할 때 곧바로 실천하지 못하고 계속 괴로운 상태에 남았다. 차는 내게 있어 순간과의 조화보다는, 지금이 아닌 과거, 미래와의 불화를 다소나마 해소하는 요소였다. 그리고 내가 내 일상에 조금이나마 품위를 갖추는 노력의 일부. 생각해보면 하루에 티백 하나를 쓰면서, 아직 우려먹을 티백이 있을 때까지(3번쯤) 균형을 유지했던 것 같다. 무균의 정수만 마실 때는 쉽게 휘청거렸고 말이다.

 나는 지출에 있어 차에는 덜 인색했다. 식사메뉴는 선택의 여지없이 어떻게든 배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아침에 어떤 차를 마실지 고르는 것은 하루를 통틀어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몇 없는 요소 중 하나다. 날씨에 숱한 영향을 받는 나와, 날씨를 손아귀에 쥐려하던 폰 노이만의 이야기를 읽은 이 시점에서 인용한 36페이지의 문구는 큰 영감이 되었다. 차 말고도 다른 해독제를 나는 찾아봐야겠다. 흐린 날씨와 사물이 침묵하는 검은 시간 앞에 나를 지킬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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