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an 06. 2021
헤매는 우리 마음을 잡아줄지 모를 시
시집,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김용택
책장을 정리하다 보면 예전에 있던 책들 중에 그냥 한 번쯤 다시 꺼내보고 싶은 책들이 있다. 주로 책을 빌리기보다는 사서 읽다 보니 어떤 책은 갖고 있고 싶은 마음이 들고, 또 어떤 책은 한 번 읽고 다시 펼쳐 보게 되지 않는 책들도 있다. 이제 그런 책들은 과감히 알라딘 중고서적 판매로... 책이 또 쌓이게 돼서 정리를 하다가 구석에 꽂힌 책을 다시 꺼내 봤다. 내게 가끔 책을 선물해 주는 친구에게 받은 몇 년 전 선물... 드라마 도깨비가 열풍을 일으키던 그 시절, 사실 난 당시에는 그 드라마를 안 봤었는데, 공유가 낭독해서 관심을 받게 된 시 김인육의 「사랑의 물리학」이 들어있는 시집을 친구가 선물했었다. 김용택 시인이 여러 시인들의 시들을 직접 읽고 써보며 독자들도 필사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른 101편의 시와 독자들이 뽑은 김용택 시인의 시 10편이 들어있는 시집《김용택의 꼭 한 번 필사하고 싶은 시》...
김용택 시인은 너무나 유명한 분이라 설명이 필요 없는 분... 지금도 시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몇 년 전에는 시를 일부러 찾아 읽지도 않았던 나는 이 책을 선물 받고도 한 번 휘리릭 읽고 그대로 책장에 두었지 싶다. 친구의 선물이니 고이고이 간직만 잘하면서... 독자가 시를 읽으며 필사하게끔 되어 있는 책이라 첫 장을 펼치니 책에 대한 활용법과 필사의 예시들이 들어 있었다. 시를 쓰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마음의 평화를 찾아줄 수 있다는데, 쓰지 않더라도 한 장씩 넘기며 여러 시인들의 좋은 시들을 보기만 해도 편안한 시간이다.
시집을 들춰 보니 아는 시도 보이고, 처음 보는 시도 보이고... 내게 좋은 시는 아마 사람마다 다 다르지 싶다. 그날의 내 상황과 기분에 따라 같은 시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니까... 어느 날은 좋은 느낌으로 보았던 시가 어느 날은 큰 감흥이 없는 걸 보면 시를 읽을 때 또 마음의 일렁임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듯하다. 공유가 낭독했다던 그 시...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로 끝나는 「사랑의 물리학」이 시집의 맨 첫 장에 나와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바로 다음 장에 나온 이병률 님의 「백 년」이라는 시가 난 더 좋았다.
백 년 - 이병률
백 년을 만날게요
십 년은 내가 다 줄게요
이십 년은 오로지 가늠할게요
삼십 년은 당신하고 다닐래요
사십 년은 당신을 위해 하늘을 살게요
오십 년은 그 하늘에 씨를 뿌릴게요
육십 년은 눈 녹여 술을 담글게요
칠십 년은 당신 이마에 자주 손을 올릴게요
팔십 년은 당신하고 눈이 멀게요
구십 년엔 나도 조금 아플게요
백 년 지나고 백 년을 한 번이라 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을 보낼게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구구절절한 그 마음이 다 담겨있는 듯한 시... 어쩜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지... 시를 짓는 시인들의 마음은 어떻길래 저런 예쁜 문장이 나오는 걸까? 시집에 이병률 님의 「찬란」이라는 시도 들어 있는데 그 시도 좋아서 팬이 될지도... 이병률 님의 여행 에세이도 사놓고 아직 못 읽었는데 얼른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김용택 시인이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라는 시집의 제목을 지으면서 따온 댄 조지의 시 「어쩌면」... 치프 댄 조지라고 불리는 그는 캐나다 인디언 부족의 추장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시를 썼을 때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쩌면 - 댄 조지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데려갈 거야
어쩌면 별들이 아름다움으로
너의 가슴을 채울지 몰라
어쩌면 희망이 너의 눈물을
영원히 닦아 없애 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묵이 너를 강하게 만들 거야
정현종 님의 「방문객」도 내가 좋아하는 시...
방문객 -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머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마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사람을 맞이하는 일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그 스침을 넘어 한 사람을 맞이한다는 게, 더군다나 마음에 들인다는 건 정말 그의 모든 걸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너에게 무엇이고 너는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기를, 마음에 담고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이기를... 부서졌을 마음조차 보듬을 수 있는 우리이기를...
시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읽다 보면 담고 싶어 지는 시들이 많아 그동안 너무 오래 책장에 묵혀둬서 좀 미안해지기도 한다. 마지막 장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멈추고 눈을 감고'에는 독자가 사랑하는 김용택의 시 열 편이 담겨있다. 첫 번째 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두 번째 시 「참 좋은 당신」...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 김용택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참 좋은 당신 -김용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그리고 또 다른 김용택 시인의 시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 시인 듯 편지인 듯 길게 이어지는 이 시가 참 인상적이었다. 딸이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글 같은 시... 궁금해서 찾아보니 시인의 딸이 유학 중일 때 아빠에게 보낸 편지를 읽고 쓴 시라고 했다.
편지 같은 이 시를 읽는데 마음이 울컥울컥 했다. 자기 인생을 독립적으로 쌓아가기 위해 방황하고 고뇌하며 또 스스로 일어서려는 딸을 응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있는 듯했다. 그런 딸이 애달프지만 당장 옆에 있어 줄 수 없고 그저 잘 해낼 거라는 믿음으로 묵묵히 지켜보고 조용한 응원을 보내는 아빠의 심정이라니...
안녕, 아빠. 지금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마치 시 같다.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이 한그루의 나무 같다.(…) 나는 가지런하게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 해. 이국의 하늘, 아빠, 여기는 내 생의 어디쯤일까? 눈물이 나오려고 해. 버스가 영화 속 장면처럼 나를 데리러 왔어. 아빠는, 엄마는, 또 한 차례 또 한 계절의 창가에 꽃 피고 잎 피는 것에 놀라며 하루가 가겠네. 문득문득 딸인 나를 생각할지 몰라. 나는 알아. 엄마의 시간, 아빠의 시간, 그리고 나의 시간. 오빠가 걸어 다니는 시간들, 나도 실은 그 속에 있어.(…) 나는 뉴욕으로 갈 거야. 뉴욕은 터득과 깨달음을 기다리는 막 배달된 책더미 같아. 어디에 이르고, 어디에 닿고, 그리고 절망하는 도시야. 끝이면서 처음이고 처음이면서 끝 같아.(…) 비행기 트램을 오를 거야. 그리고 뉴욕. 인생은 마치 시 같아. 난해한 것들이 정리되고 기껏 정리하고 나면 또 흐트러진다니까. 그렇지만 아빠. 어제의 꿈을 잃어버린 나무같이 바람을 싫어하지는 않을 거야. 내 생각은 멈추었다가 갑자기 달리는 저 푸른 초원의 누떼 같아. 그리고 정리가 되어 아빠 시처럼 한그루 나무가 된다니까. (…) 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오를 거야. 아빠, 너무 걱정하지 마. 쓰러지는 것들도, 일어서는 것들처럼 다 균형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알아가게 될 거야. 아빠, 삶은 마치 하늘 위에서 수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바람 같아. 안녕, 피츠버그, 내 생의 한 페이지를 넘겨준 피츠버그, 그리고 그리운 아빠.
피츠버그를 떠나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딸... 그런 딸의 마음을 헤아리고 딸의 모습이었으면 하는 마음을 시로 담아낸 아빠... 시속 화자처럼 우리 모두는 삶 속에서 하나의 과정을 마무리하고 또 다른 과정을 살아내기 위한 시작에 서야 하는 순간들을 수없이 만난다. 그때마다 느끼게 되는 불안, 기대, 지난 것에 대한 후회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까지... 그 모든 감정을 홀로 견디고 이겨내며 내게 오는 시간들을 각자의 방법과 속도대로 살아내는 게 또 우리들의 모습이다. 몇 년 동안 책장에 있던 시집 속에서 발견한 김용택 시인의 시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 따로 옮기기엔 너무 길어 사진으로 대신하지만 마음의 위로가 필요할 때 자주 꺼내 읽게 될 시가 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