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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리아 Mulia Jan 17. 2021

해주 냉면...너의 이름은...

집콕하는 요즘이라 일주일에 한 번 잠시 몇 시간 회사에 다녀오는 일과 장 보러 마트에 가는 일, 그리고 가끔 아이들 픽업하러 나가는 일이 요즘 나의 외출의 전부다. 온라인 주문을 하기도 하지만 직접 살 식재료들도 있으니 코스트코에 가끔 가는데 며칠 전 장 보러 들렀다가 냉동고에서 반가운 이름을 만났다. 해주 냉면!!  

38년 전통의 마법 양념, 신천 해주 냉면! 겉봉투에 쓰여있는 그 문구를 보니 잠실 신천의 그 해주 냉면이 맞나 싶고 반가운 마음에 하나 꺼냈다. 신천에서 매운 냉면으로 유명한 해주 냉면... 결혼 전까지 부천에 살던 내가 서울 신천의 해주 냉면을 알게 된 건 대학 친구들 K와 O 때문이었다.


신천과 잠실에 살던 그녀들... 골목길에 자리 잡은 해주 냉면에 들어가서 처음 냉면을 먹었던 날... 맘껏 먹을 수 있었던 뜨끈한 육수와 매콤한 양념의 비빔냉면... 독특한 그 매운맛이 자꾸 생각나 그 뒤로 우리는 자주 그곳에 갔다. 늘 냉면을 먹고 난 다음날은 배가 아파 고생을 했지만 중독스러운 그 맛에 쓰린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먹고 싶은 그런 냉면이었다. 내게 해주 냉면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한 이후로는 학교 다닐 때처럼 해주 냉면 집에 자주 못 갔다. 잠실 살던 친구는 분당으로 이사 가고, 신천, 부천, 분당에 흩어져 살던 우리가 주로 만나는 곳도 명동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나의 20대 시절 기억의 대부분은 K와 O와 시간을 함께 보냈던 신천, 종로, 명동에 머문다. 명동은 일 년에 두세 번씩 가고 몇 달 전에도 다녀왔지만, 신천에는... 큰 아이 임신하고 해주 냉면이 먹고 싶어 신랑과 같이 다녀온 이후로 거의 20년간 가보질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가보질 않았으니 식당의 분위기도 사람들도 모든 것이 변했을 듯싶다. 그 사이 달라진 나, K 그리고 O... 우리 셋의 관계처럼... 우리 중에 O가 제일 먼저 결혼을 하고, 그다음이 나였다.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나와 O의 30대는 정신이 없었고 대기업에 취업한 K 역시 결혼은 뒤로 한 채 회사생활만 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생활패턴, 달라진 관심사... 그래도 우린 매년 서로의 생일에 만났고, 아이를 재운 후와 야근 후 늦은 퇴근길이 겹칠 땐 전화와 카톡으로 서로의 근황과 안부를 물으며 지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상해진 K... 문자를 보내도 전화를 걸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사이 우리가 싸웠나? 내 기억엔 시간이 없어서 잘 못 만났던 것 밖엔 기억이 없는데... 얼굴은 못 보지만 늘 먼저 내가 연락을 했었다. 그것도 자주... 그런데 무슨 일인지 문자엔 답도 없고 심지어 셋이 하던 카톡에서는 말없이 나가버리기까지... O에게도 이유를 물어봤지만 그녀도 알지 못했다. 그녀 역시 얼마 전 K와 다투어서 연락 안 한지 오래라고... 이유를 모르니 답답했고, 관계가 불편해지니 내 마음 역시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너무 허무하게 변해버린 우리 관계... 더 웃긴 일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거다.


O와는 일 년에 한두 번 만난다. 처음엔 답답한 마음에 O를 만나도 늘 K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심지어 O에게 이렇게 물었었다. 너는 혹시 이유를 아는 거냐고, 내가 K에게 뭘 잘못한 게 있는 거냐고...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생각했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상대적이니 혹시 내가 모르고 지나쳤을 잘못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O가 내게 그러는 거다. "K... 많이 변했어. 우리가 알던 예전의 그 K가 아니야.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넌 너대로 살아. 그냥 놔버려... " 놓는다고 놓아지는 관계... 20년 넘은 우리 관계가 고작 그 한마디 '놔버려'라는 그 말에 놓아질 그런 관계였던 걸까? 허탈했다. 뭔지 모를 배신감에 힘들었고, 차라리 싸우기라도 했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답답했다. 친구관계로 힘들어하는 여고생도 아니고 나이 마흔이 넘어서 뭐하는 짓인지 정말 싫었다.

사라지고 싶은 날 (나나킴) 중에서

K와 나의 관계는 그렇게 딱 거기까지로선 그어진 그런 관계가 되었다. 그 이후로 몇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나는 K를, K는 나를 서로가 그어 놓은 그 선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다른 일들은 가끔 잘 잊어버리기도 하면서 K에 대한 기억은 잘 잊히지가 않는다. 카톡에 여전히 남아 있는 그녀의 이름... 지금 그 번호를 쓰는지 조차 알 수도 없다. 빈 프로필 사진... 눈코 입도 없는 그 사진만 보일 뿐... O와 만나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 애써 묻지 않는 K다. 상처가 나면 아프지만 그 위에 딱지가 앉아 떨어지고 나면 아픔은 사라지고 희미한 흉터가 남는다. 하지만 내게 상처가 된 그녀는 곪아있는 그 상태로 그대로다. 나의 20대와 30대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녀라 그녀를 들어내면 나의 젊은 시절이 푹 파여 버릴까 봐 그냥 그렇게 곪아 버린 채 두어 버리는 그런...




내가 그날 코스트코 냉동고에서 본 해주 냉면이라는 글씨는 냉면의 맛에 대한 기억과 함께 쓰라린 기억까지 되새기게 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맛... 다시 마주하면 어떨까... 집에 오면서 그 맛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냉동이라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뒤에 적힌 레시피대로 조리했다. 매운 냉면을 먹기 전에 위를 보호해 줄 계란 반쪽은 없었지만 그릇에 담고 사진도 찍어 본다.

드디어 내 입에 들어온 한 입...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그 맛이 아니다. 실제 냉면과 싱크로율 90프로라고 그러던데 내 입맛이 변한 걸까? 다시 먹어 보았지만 여전히 내가 아는 그 맛이 아니라 실망하며 젓가락을 놓았다. 실제 식당에서 사 온 냉면도 아니고 마트에서 파는 냉면에 난 뭘 기대한 걸까? 20년 가까이 맛보지 못한 냉면 맛이라 생각하니 내가 기억하는 내 입맛에도 자신이 없어진다.  지금 보니 사진도 참 맛없게 찍었구나...


변해버린 냉면 맛... 달라진 우리 사이 같다. 저녁 내내 생각해 봤다. 그 맛에 대해서... 후기도 찾아봤다. 다들 만족스럽다는 평이 대부분이던데... 내가 알던 그 맛이 아니라고 벅벅 우겨봐야 내가 우스워질 것 같은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만약, 그 냉동 해주 냉면이 그 옛날 대학 시절 먹던 그 맛과 같았다면 그땐 기분이 좀 달랐을까? 냉면 맛은 여전히 같은데 왜 우리만 이렇게 된 거냐고 변해버린 우리 관계를 더 헤집어 놨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다행이다. 우리만 변한 게 아니어서...


4인분 중 남은 3인분... 냉동실에 있는 그 냉면을 어찌해야 할까... 내가 알던 해주 냉면 맛은 아니었지만 매운맛의 고통은 여전했다. 하루 종일 배가 아파 고생했던 하루... 냉면을 먹은 다음날, 그리움에 대한, 씁쓸한 기억을 소환한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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