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리아 Mulia Feb 28. 2021

딸에게 주어진 한 달의 자유시간

올해 열다섯 살이 되는 우리 딸... 어릴 때부터 큰 문제없이 잘 자라주고 있는 딸이다. 남동생만 있는 내가 늘 언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아이들을 생각하면 동성의 형제가 있는 게 좀 더 나을지 모르겠지만 부모 입장에서는 우리처럼 딸 하나 아들 하나 있는 게 편할 때도 많다. 그냥 남자와 여자라 다른 그런 느낌? 뇌 구조 자체가 다른 것 같은 신랑과 아들의 마음을 가끔 이해하기 힘들 때 같은 여자인 우리 딸이 내게 큰 힘이 되어 준다.


딸은 엄마를 닮아간다고 하는데 우리 딸은 나랑 많이 닮았나라는 생각을 키우면서도 많이 한다. 성격적인 면에서 소심하고 걱정도 많고 약간 안달복달하는 나에 비해 우리 딸은 좀 더 강단이 있고 의외로 쿨하다. 쉽게 말해 감정 정리가 빠른 편... 관계 속에서 휘둘리며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잘 아는 나인지라 딸의 쿨한 모습을 보면 다행이구나 싶지만, 가만히 지켜보다 순간순간 그런 모습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속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될 때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화장실에 갈 때도 따라다니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조잘조잘 얘기했던 나와는 달리 딸은 굵직한 큰 이야기만 하지 누가 이랬고 뭐는 어땠고를 자세히 얘기하는 편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딸이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고 그날의 표정이나 기분을 살펴 이상한 점이 없는 것 같으면 별일 없는 사인으로 알고 넘어갔다.


다른 학교생활이야  워낙 잘해주고 있으니 크게 신경 쓰진 않는데 내가 제일 마음이 쓰이는 부분은 역시나 친구관계... 큰 아이 학교 엄마들하고는 깊은 관계까진 아니어도 두루두루 알고 지냈는데 딸아이 학교 엄마들하고는 두세 명 정도 말고는 거리를 둔다. 딸이 5학년이었을 때 3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 또 내가 언니라고 부르며 많이 의지했던 그 친구의 엄마... 그 두 모녀에게 된통 당한 이후로는 딸아이의 친구 엄마와 내가 친구가 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한 이유로... 그렇다 보니 중학교에 입학해서도 딸아이와 친한 친구 엄마가 누구인지 모르고 혹시라도 딸에 관해 궁금한 일이 생겨도 연락해 볼 방법이 없다.


수학학원에서 만난 친구와 중학교에서도 같은 반이 되면서 유독 친하게 지내더니 지난달 말 즈음 딸아이는 그 친구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다. 문제는 딸이 섭섭해하는 이유를 그 친구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이번 일 말고 그동안 지내오면서 말 안 하고 넘겨왔던 감정들이 있었나 본데 그게 해소되지 않고 쌓이다 보니 이번 일로 딸아이의 서운함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믿고 의지했던 친구와 그런 일이 생기니 나도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초지종을 물어보았고 딸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 얘기했다. 주관적인 감정을 배제하고라도 딸의 섭섭한 마음이 이해가 갔다. 엄마 같아도 충분히 그런 마음이 들 것 같다고, 그동안 네가 그 친구에게 쏟은 마음이 있는데 너무 속상하겠다고 말하며 이젠 그 친구에게 다시 연락 안 할 거라는 딸아이를 진정시켰다.


어른이나 아이나 관계를 푸는 건 본인들에게 달린 일... 지켜보는 마음은 아프지만 내가 나서서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딸이 왜 섭섭하고 무엇 때문에 속상한지를 그 친구가 분명히 알았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설사 다시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로 짐작만 하고 끝나버리면 그 관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조금 진정된 뒤 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시 연락 안 하더라도 네 감정을 알리는 건 필요한 일 같다고... 다른 오해하지 않게 넌 네 마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그 마음을 이해하든 안 하든 그다음 문제는 그 친구의 이니 너의 손을 떠난 일이라고... 그렇게만 말해주고 그다음은 이제 딸아이가 혼자 해결하기를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계속 풀이 죽어있는 딸... 아무것도 하기 싫은 눈치였다. 사실 친구와의 일이 아니어도 몇 달 전부터 딸아이의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들로 좀 복잡해 보이긴 했었다. 공부는 하기 싫어도 꼭 해야 한다는 걸 본인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학원도 열심히 다니고는 있지만 사실 많이 피곤하고 지쳐 있었다.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길이 없으니 시간이 나면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보는 정도... 그러고는 또다시 같은 생활 반복... 그리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떠보듯 계속 내게 묻는다. 어느 날은 "엄마, 내가 미술 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라더니, 또 그다음 날은 "엄마, 내가 바이올린 전공한다고 하면 허락해 줄 거야?"라고 묻고, 또 며칠 뒤에는 "엄마, 나 차라리 외고를 갈까?"라며 꾸 나의 반응을 살폈다.


내가 정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좋겠지만 선택은 본인이 해야 하니 그저 그런 혼란스러움을 덜어줄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본인도 머릿속이 복잡하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고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이 늘어 나와도 사소한 일로 말다툼하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날은 학교도 학원도 다니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며 무기력한 모습까지 보이길래 안 되겠다 싶어 딸에게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해진 해야 할 일들   자기 시간을 마음대로 써보고 싶다 했다.


생각해보니 학교도 학원도 다 안 다니고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있는 시간은 딱 2월 한 달 뿐이었다. 3월부터는 온라인이든 등교 수업이든 개학이니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상황은 안 되겠기에 뭔가 결정을 하려면 지금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딸에게 한 달 동안 학원도 다 끊고 너 하고 싶은 대로 시간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잠시 멈칫하더니 막상 다 안 다녀도 될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세 과목 중에 하나만 다니겠다고 하길래, 그러지 말고 한 달 동안 다 멈춰도 되니 걱정 말라고, 1년도 아닌데 그 한 달 공부 안 한다고 크게 어떻게 되지 않는다며 딸을 안심시켰다.


바로 다음 날, 간단히 딸의 상황을 선생님들께 말씀드리고 한 달간의 멈춤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그동안 딸의 상태를 가까이서 보셨기 때문에 선생님들도 다들 이해해 주시는 눈치... 솔직히 입시가 코앞에 닥친 것도 아니고 이제 시작하는 아이니 그 정도는 괜찮다는 마음이 선생님들도 나도 있었던 거다. 그렇게 2월부터 딸은 숙제에서도 벗어나고 공부 스트레스도 살짝은 비껴가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다만 친구와 불편한 관계는 계속인 듯해서 걱정은 되었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니 기다려보기로...

 



2월의 첫날이었던 월요일, 퇴근하고 큰 아이를 학원에 내려주고 딸에게 드라이브를 가자 제안했다. 그랬더니 흔쾌히 따라나서는 딸... 가는 길에 좋아하는 아마스빈 버블티를 테이크 아웃해서 차에서 마시며 일단 인천대교를 탔다. 영종도 주변으로 갈까 했더니 딸이 공항으로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래 가자, 인천공항!! 1 터미널 2 터미널 다 가보자!! 차에서 딸과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내가 학창 시절 겪었던 친구 얘기부터, 시험 보고 들어갔던 고등학교 이야기, 대학 갈 때 고민했던 진로 이야기, 어른인 지금도 겪고 있는 이런저런 일들에 대해...  

북적이던 공항은 썰렁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공항이라는 말만 들어도 늘 설레는 우리 아니던가! 차와 사람으로 붐비던 그곳, 예전 기억과 오버랩되는 그 장소를 차로 지나며 여행자로 설레었던 순간들도 떠올려 보았다. 터미널 사진 몇 장 찍어올걸, 차 타고 지나가느라 눈으로만 보았더니 글을 쓰는 지금 없는 사진이 살짝 아쉽다. 1 터미널을 보고 2 터미널로 갈까 하는데 갑자기 딸이 말했다. "엄마, 여기 파라다이스 호텔인가? 예전에 영어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기회 되면 한번 가보라고 그러셨거든... 거기 가 보면 안 돼?" 

안될게 뭐 있겠니... 바로 옆이니 가면 되지... 차를 돌려 바로 갔다. 파라다이스 시티 호텔로... 8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으니 로비와 푸드코트 옆 광장 정도만 둘러보고 오면 되겠지 싶었다. 생각해보니 코로니 시절 이전, 친구들과 몇 번 모임이 있어서 갔었으면서 딸을 데리고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었다. 역시 예전 같은 분위기는 아니지만 딸과 잠깐의 시간을 보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의 호박 작품이 있는 로비부터 테디베어 숍, 이곳저곳을 걸으며 구경했다.

머문 시간은 30분 정도... 하지만 딸과 손잡고 그 공간을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 전환이 되는 그런 시간이었다. 다시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딸과 또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그리고 약속했다. 상황이 좀 좋아지면 여자들끼리 가는 여행을 가자고...


코로나로 밖으로 돌아다니진 못하지만 그렇게 2월의 첫날 이후로 집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더니 딸의 기분이 좀 나아지는 듯 보였다.  같이 방 정리도 하고 그동안 미뤄 두었던 한의원에도 가고, 무엇보다 딸과 함께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딸과 둘만 프라이빗하게 수업을 받으려다 보니 금액적인 부분이 부담이 되는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 아니면 그런 일들은 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앞서 과감히 결정했다.  


그렇게 지낸 2월... 워낙 짧은 달이니 이제 딸의 자유시간도 이번 주말로 끝이다. 그래도 그때 멈춰서 쉬기를 잘했다는 생각은 든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시간들을 보냈을 게 분명하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걱정스러웠던 부분도 해결이 되었다. 딸이 그 친구와 화해하고 다시 예전처럼 지내기로 했다는 것... 딸이 그 친구에게 얘기 좀 하자고 먼저 연락을 했나 보다. 그랬더니 그 친구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동안의 감정을 둘이 울면서 다 풀었단다.


성격상, 본인이 싫으면 시켜도 안 했을 텐데 먼저 손을 내민 딸이 대견했다. "**이가 먼저 전화해주기를 바랐을 텐데 섭섭하지 않았어?"라고 물었더니, "걔도 소심해서 아마 속으로 생각했어도 먼저 연락 못했을 거야."라는 딸... 그날 밤, 두 녀석수다는 다시 시작되었다. 속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이제 새 학기도 시작될 텐데 그전에 불편한 마음들이 해소된 게 무엇보다 기뻤다.


이제 3월이다. 일 년 중 내게 3월은 가장 심적으로 분주한 달이다. 아무래도 엄마이다 보니 아이들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 그럴 수밖에... 작년은 준비 없이 찾아온 코로나로 유례없는 한 해를 보냈다. 그래서 3월 특유의 그런 느낌은 느낄 새가 없었는데 올 3월은 어떠려나... 그래도 작년보다는 나아지겠지라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며 3월을 기다려 본다. 코로나로 더 많은 것들을 함께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딸이 보낸 2월 한 달간의 자유시간이 딸에게도 힘을 주었던 시간이었기를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튜브로 책을 읽는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