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리아 Mulia Feb 20. 2021

황혼이 더 아름다운 삶

새해와 함께 한 살 더 먹은 나이... 이제 40대 중반도 지나 후반으로 가까워지는 나이가 되었다. 백세 시대에, 아니 80까지 산다 해도 이제 그 인생의 반을 넘겨 가는 중인 나이... 신랑이나 나나 한참 일하고 있고 아직 애들 뒷바라지도 많이 남았다. 아주 젊지도 그렇다고 아주 나이 들지도 않은 이 애매한 시기에 본격적인 나이 듦에 대해 얘기하는 건 어쩌면 조금 이른가 싶다가도,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나이 듦을 향해 나아가게끔 되어 있으니 지금의 내가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들의 모습을 봐도 그렇고... 거창한 노후준비라기보다는 아이들이 다 독립하면 나중에 어떻게 살 것인가, 지금 하는 일은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등등에 대한 아직은 막연한 생각...

즐겨 보는 TV 프로가 많지 않지만 그중에 좋아하는 프로 중 하나가  EBS '건축탐구 집'이다. 단순히 집을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어 좋아하는데, 작년 여름쯤  '황혼의 집, 비탈에 서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이재수 할머니와, 박성희·주덕영 부부의 집과 그들의 이야기가 꽤 오래 인상적으로 남았다.

30대에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들 키우며 혼자 살아오신 이재수 할머니...  주어진 대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살아오셨고, 2006년 경기도 가평에 노후를 보내기 위해 집을 지으셨다고 한다. 할머니 연세에 계단을 오르내리는 게 힘들게 보이고 큰 집에 혼자 사시는 게 외로워 보였지만  할머니에게 이 집은 마음의 여유를 찾게 해 준 집이라고 한다. 각박한데 살았으면 더 힘들었을지 모른다고... 이제는 더 소중한 게 세월이니, 잠깐 비추는 햇빛, 눈 내리는 겨울날의 온기 이런 것들은 경제적 가치와 바꿀 수 없는 행복이라고 말씀하시는 할머니... 인위적으로 경사면을 깎지 않고 자연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집을 지으셨던 그 마음처럼 주어진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이 기억에 남았다.

'잘 늙어간다는 것은 내려놓는다는 것'...   삶의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느끼며 사는 삶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큰 집에서 혼자 사시는 모습이 쓸쓸해 보일지 몰라도 30대에 사별하고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그 모질고 긴 시간들을  버텨오신 할머니는 15년째 그 집을 가꾸시면서 할머니만의 쉼이 있는 편안한 시간을 만들고 계셨다.

그리고 강원도 평창에 위치한 두 번째 집의 주인이었던 박성희,  주덕영 두 부부의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참 좋았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시작한 남편의 퇴직 생활... 40년간 공직생활을 하시다 퇴직 후 번아웃이 와 1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책만 보던 남편을 아내가 바꾸어 놓았다고 하셨다. 아내분인 박성희 님은 자식 걱정도 내려놓았으니 이젠 내가 원하는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다고... 집을 못 짓고 죽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 강원도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셨는데 이젠 남편인 주덕영 님에게도 시골 생활의  새로운 재미가 삶의 활력이 되고 있다.

두 분의 집에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공간은 예술제본을 하시는 박성희 님의 작업실... 방송을 통해 '예술제본'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예술제본은 '인쇄된 책이나 낱장의 기록물을 견고하고 아름답게 엮어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제본 방식'을 말하는데 박성희 님은 50세가 넘어서 예술제본을 배우셨다고 한다.

보기에도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 예술제본이라는 분야가 생소했지만 너무 특별해 보여서 오히려 집 소개보다 더 뚫어지게 봤던 것 같다. 아파트에서 작업할 때보다 소음 신경 안 쓰고 마음껏 할 수 있어서 너무 만족한다고 말씀하시는 할머니 모습이 소녀  같고 예뻐 보였다. 어떤 계기로 그 일을 시작하셨는지에 대해서는 방송에서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어쩌면 늦었다고 생각되는 그 나이에 새로운 일에 도전하시고 지금까지도 만족하며 작업에 몰두하시는 모습이 젊은이들의 모습보다 더 열정적으로 보여 기억에 더 남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손글씨로 직접 기록하시는 일상들... 조용한 작업실에서 하루를 돌아보며 기록하는 그 순간이 박성희 님 마음에도 차곡차곡 쌓여서 평온한 일상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아, 보는 내내 나이 들어서 저렇게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박성희 님은 노년의 삶도 생각하기에 따라서 아름답다고 말씀하셨는데 보기에 두 분은 충분히 아름다운 황혼의 삶을 조용히 만들어 가고 계시는 듯했다.

"삶의 오르내리는 길을 지나 쉬어가는 황혼의 길"... 두 부부의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일상을 보며 내게도 다가올 그 시간들을 생각해 본다.  이분들에 비하면 아직 팔팔한 인생을 살고 있는 나지만 저분들처럼 삶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지낼 수 있는 노년의 삶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그런 삶이라면 나이 듦을 탓하지 않고 핑계 대지 않고 기꺼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중요한 건 저분들의 현재의 삶이 그냥 얻어진 건 아니라는 것...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오셨을 테고, 기쁨과 함께 굴곡도 있었을 그분들의 삶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그분들의 평온한  현재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편안한 노후를 위해 물질적인 부분도 물론 뒷받침이 되어야겠지만 우선은 노년의 삶을 받아들이는 건강한 몸과 마음이 우선인 것 같다. 그리고 후반기 인생에 대한 계획들도 차근히 생각해 두어야겠다. 일흔의 나이에도 예술제본가로 활동하시는 박성희 님처럼 도전이 아름다울 수 있기를, 무언가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기를 ... 나의 노년은, 나의 황혼기는 그렇게 평온하고 은은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